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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Aug 22. 2024

의문의 '파프리카'가 배송됐다.

- B로 시작하는 Blood(혈육)

날이면 날마다 택배 물품이 당도한다.

그런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됐다. 

아니, 날이 새기 전에 배송될 때도 많다.

로켓배송, 새벽배송 등이 있으니 말이다.


예전에는 경비실에 가서 확인 사인을 하고 택배 물품을 찾았다.

팬데믹 때부터 현관문 앞까지 물품이 배송되니 그건 좋다.


내가 주문한 것인데 배송된 박스를 보고도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아리송할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이 지내는 본가와 우리가 사는 세컨 하우스에 거의 매일같이 택배 물품이 온다.

게다가 교회에 필요한 것을 주문할 때도 있고 쿠팡에 저장된 주소를 클릭하고 형제들에게 종종 물품을 사 보내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의문의 물품이 배송되어 올 때가 종종 있다.

지인들이 과일이나 선물을 말없이 보내온 적이 몇 번 있었다.

결국 보낸 이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 적도 있었다.

'혹시, 홍삼 보내셨어요?'라고, 짐작 가는 분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느 날처럼 택배 물품이 도착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가 주문한 것은 아니었다.


커다란 상자에 먹음직스러운 파프리카 그림이 실사 이미지로 그려져 있었다.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세컨 하우스의 주소를 아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몇 안 되는 분 중에 누가 파프리카를 보냈을까?


박스에 부착된 운송장을 찬찬히 살펴 봤다.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물 보낼 때는 생산자나 판매자가 발송인이 된다.

운송장에 있는 파프리카 생산자 연락처를 알아냈다.


"여기 인천인데요, 오늘, 파프리카 한 상자가 배송됐네요, 누가 보냈는지 알 수가 없어서요."

"아하, 여긴 남원인데요. 혹시 E라는 분 아세요?"


'아하 E였구나.'


극상품 파프리카는 E가 보낸 것이었다.





E는 시누님의 장녀다.

그야말로 K-장녀다.


남편에게 누님이 있었다.

어느 날, 위암 말기라는 비보를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누님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E는 고등학생이었고 그 밑에 동생이 둘 있었다.


E가, 엄마 없는 하늘 아래서 그 동생들을 도맡아 챙겼다.

왜냐하면 E의 아빠, 즉 시누이 남편은 곧바로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E의 든든한 케어로 동생들은 어려움 없이 잘 자랐다.

그러구러 세월이 흘 E는 물론 동생들도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시댁은 칠 남매였다.

형제자매와 그 자녀들이 다 모이면 서른 명도 넘는 대가족이다.

우애가 좋아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것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좋아한다.

모임이 있을라 치면 그들은 마음이 들떠서 며칠 전부터 콧노래를 부르곤 한다.

모이기만 하면 그들은,  '개그 대회'에 나온 사람들처럼 한 마디씩 웃기는 말을 툭툭 던진다.


시누님은 떠났지만 시댁의 모임은 여상했다.

E와 조카들은 엄마 없는 외가라 그랬는지 발걸음이 뜸했다.

경조사에 한두 번 얼굴을 본 것이 전부였다.


E는 막내 이모랑은 계속 연락하며 지낸다고 했다.

옛말에 이모는 '엄마 대신'이라 하지 않던가?

이모를 엄마 삼아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나눴나 보다.


사느라 정신 없었는데 한숨 쉬겠다 할 즈음에 아들이 큰 사고를 당했다.

우리는 그때부터 시댁 형제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무려 12년 동안이나...

그래서 더욱, E와는 이웃사촌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친환경 극상품 파프리카를 보자, E는 간병으로 지쳐 있을 큰 외삼촌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이모에게 우리 집 주소를 알아내어 파프리카를 보낸 것이다.

문자로 미리 알려주지 않아 서프라이즈가 되었다.


남편이 E에게 고맙다며 한참 통화했다.


"드셔 보신 후에 맛있다고 하시면 또 보내드릴게요."


E가 정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E도 어느덧 중년이 됐다.

E도 우리랑 같이 늙어가고 있는 셈이다.

외삼촌을 생각하여 그런 것을 챙겨 보내다니 가슴이 찡했다.


엄마 없는 30년 동안 E가 감내했을 시간들을 생각하니 맘이 아렸다.

내 코가 석자라 E와 조카들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 미안하고 후회됐다.


E는 자기 동생들이 비빌 언덕으로 살았을 것이다.

때로 엄마 생각이 나면 외가에 와 보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의 혈육인 외삼촌과 이모들과 한데 어울려 지내고 싶었을 것이다.

외가의 모임에 쉽사리 낄 수 없어 혈육의 정이 사무쳤을 것 같다




혈육은 티격태격하더라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던가 싶다.

다시 만나면 별일 없었던 것처럼 원래의 관계가 된다.

혈육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다.

연을 끊는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핏줄이며 혈육이다.


서로 얼굴이라도 보며 지내자고 E에게 손 내밀었어야 했다.

굳이, 안 보며 지낼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시누님이 계셨을 때보다 더 잘 지냈어야 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것 같다.

적어도 E와 소원하게 지냈던 것은 내 불찰이다.


빛깔 좋고 튼실한 파프리카를 보니 E가 살아왔을 시간이 가늠되어 코끝이 시큰했다.

혈육의 정을 듬뿍 느끼게 해 준 파프리카였다.




배송되어 온 파프리카를 지인들에게 두서너 개씩 담아 나눔 했다.

그런 후에 파프리카로 요리를 하고, 남은 것은 두고두고 먹으려고 신선칸에 보관해 두었다. 


껍질이 통통한 파프리카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만개의 레시피'를 참고하여 '파프리카 볶음'을 했다.


굴소스 넣은 버섯 파프리카 볶음 레시피

파프리카를 버섯과 함께 볶았다.

레시피대로 굴소스를 넣었더니 일품요리가 됐다.

비주얼도 화려하고 향도 끝내줬다.

E로부터 받았던 극상품 파프리카로 식탁이 풍성해졌다.


앞으로 집안 모임이 있으면

E에게도 연락하고

혈육의 정을 나누며 지내야겠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파프리카  #시누이   #혈육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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