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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Aug 29. 2024

이런 막돼먹지 '않은' 영애 씨를 봤나

- D로 시작하는 Donation (도네이션: 후원)

막돼먹은 영애 씨》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무려 '시즌 17'까지, 총 301부작으로, 거의 10년 넘도록 방송됐단다.

그 드라마를 본 적은 없지만 타이틀은 많이 들어서 익숙하다.

 '다큐 드라마 시리즈로, 대한민국 직장인의 현실을 담아낸 드라마'란다.


막돼먹은 영애 씨(다큐 드라마)



내 친구 중에도 '영애'가 있다.

영애는 시장통에 살았다.

걔는 '예삐'라는 아명이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영애로 불렸다.

당시 대부분의 친구들은, O순,  O숙,  O자,  O님,  O희, O선 등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영애라는 이름은 뭔가 세련돼 보였다.


영애네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렇지만 농사꾼은 아니었다.

윗마을에 사는 농사꾼의 딸인 나보다는 장터에 살았던 영애가 세상을 잘 아는 듯했다.


'달가묵었다'(닳아먹다)


나는 영애를 그렇게 생각했다.


영애와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우리는 같은 초, 중등학교를 다녔으니 서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같은 반이 됐던 기억은 없다.


시골 바닥은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 정도다.

영애의 오빠는 우리 오빠랑 동기생이고 영애의 동생은 내 동생과 친구다.

영애의 부모가 내 부모와 아는 사이였으니 온 식구와 다 연결되어 있는 연대 이웃이었다.




고향 친구, 영애가 어떻게 내 아들의 사고를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영애와 연락이 닿았고 위로금을 보내왔었다.

고향 친구니까 한 두 번쯤 온정을 나눌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마치 보험금 납부하듯, 이자 내듯 영애의 후원금은 빠지지 않고 매달 답지했다.

마치 후원 단체에 기부금을 보내듯 영애는 꾸역꾸역, 어김없이 입금했다.


불의의 자전거 사고를 당한 아들은 6년 동안 입원했었다.

당시, 아들의 의료비 지출은 매월 500만 원 이상이었다.

병원비 200만 원, 간병비 300만 원 정도(당시 1일 간병비는 10만 원 정도였다. 요즘은 하루 간병비가 15~20만 원이라고 들었다.)였으니...

한강의 자갈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는 용케도 견뎠고 그 기막힌 상황에서 크고 작은 후원이 많은 힘이 됐다.


입원한 지 7년 차가 되니 병원에 더 이상 입원할 이유가 없었다.

재활 운동 치료비가 의료보험 비급여로 전환되는 법규 때문이었다.

석션기까지 세팅해야 하는 중증환자이지만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집으로 옮겨 와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했다.

인지 없는 세미코마 상태인 중환자를 집에서 케어한다는 것은 극한 상황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한계를 뛰어넘는 지출을 감수하며 아들을 병원에 그냥 눕혀둘 수 없었다.

자택을 마치 병원처럼 세팅했다.

환자용 침대, 전동 자전거, 리프트기, 경사 침대 등등...

재활에 필요한 모든 운동기구는 물론 의료용품도 모두 갖추고 집에서 부딪쳐 보기고 했다.


아들이 입원해 있을 때, 남편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으로 출근했다.

그것도 고역이었다.

병원으로 오고 가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아들을 집으로 옮겨오니 병원에 가보는 일은 그만해도 되었다.


재택 케어는 청결하고 조용한 환경에서 지내는 장점도 있었다.

그리고 아무 때라도 아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매달, 최소 500만 원 이상이나 지출되던 병원비 및 간병비 지출을 하지 않아도 됐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장점이 많았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후원해 주시던 분들께 후원금을 그만 보내시라고 했다.

친구 영애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동안 고마웠고, 병원비 지출이 많이 줄었으니 후원을 멈추어도 된다고...


영애의 답은 한 문장이었다.


"우린 친구 아이가?"

'아하, 내가 영애의 친구였지.'


영애가 또 한마디 더 보탰다.

'OO이는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영애의 말은 짧고 간단했다.

우린 친구였다.

그리고 내 아들은 영애의 아들이기도 하단다.

그 진심이 느껴져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2018년 연말에 아들을 집으로 옮겨 왔다.

그 이후에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팬데믹을 보내며 누구나 힘들었을 그 시기에도 영애는 꿈쩍하지 않고 매달 후원금을 보내왔다.

아들이 병상에서 지내 온 12년 동안, 영애에게도 크고 작은 대소사가 있었을 것이다.


영애는 순간순간 후원을 멈추고 싶을 때가 없었을까?

그런데도 꾸준히 입금을 멈추지 않은 영애의 그 뚝심이 존경스럽다.

아무 말 없이 후원금을 보내오는 영애가 큰 바위 같이 느껴진다.


영애는 고향이다

영애는 친구다

영애는 사랑이다

영애는 영애다



기부의 두 얼굴(기부에 대한 기사)


도네이션(기부)의 양면성에 대한 말이 많다.

도네이션 단체의 비리에 대한 루머도 떠돌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부는 수혜자들에게 큰 힘이 된다.

물론, 물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보다도 후원을 받을 때, 사랑받고 있다는 위안이 됐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큰 수레를 끌고 가야 하는 삶,

혹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일 때,

누군가가 그 수레를 밀어주거나

십자가의 어느 모서리를 좀 들어주는 것 같은 힘이었다. 후원은...


후원은 그런 힘을 지니고 있었다.

영애는 그동안 말없이 내 수레를 밀어주었고, 내 십자가를 들어주었던 친구다.


꼼짝달싹 할 수 없었던 12년 동안 영애와 같은 이들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애들'이 우리와 함께 '2인 3각 경기'하듯 발맞추며 동행할 것 같다.


그런데 후원을 받으니 심적 부담감이 컸다.

빚진 자의 심정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원받은 분에게 감사한 마음만큼 한편으로 죄송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 사람들은 익명으로 송금해 오기도 했다.


예수이름으로~

힘내세요~

사랑하는 OOO에게~

기도합니다~

파이팅~


후원받는 우리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이름을 숨긴 이들도 많았다.




누군가에게 후원을 받아본 삶이 있다.

자신만 챙기며 살아가는 삶이 있다.

이웃을 돌아보고 후원하며 사는 삶도 있다.


나는 후원을 받아 본 삶이니 적자 인생인 것 같다.

후원을 하며 살아온 영애는 흑자 인생인 듯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작 인생인 것 같다.


아무튼, 내 친구 영애는

막돼먹지 않았다.



[커버: Bing 이미지]

#막돼먹은 영애 씨  #다큐 드라마  #고향 친구  #도네이션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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