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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Sep 05. 2024

그 '칸트'는 아침마다 절망에게로 간다

D로 시작하는 Dad(아빠)

걸어 다니는 시계

칸트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산책을 나섰다.

그런 칸트를 '쾨니히스베르크 시계'라 했다.



한 아빠가 있다.

그를 '걸어 다니는 시계' 혹은 '우리 동네 칸트'라고 불러주고 싶다.


그가 병상에 있는 아들을 돌보며 지낸 지 열두 해다.

그는 아들의 성년 후견인이다.

그래서 아들에 관한 모든 행정적인 일이 그에게 넘어와 있다.


아들은 12년 전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사경을 헤맸다.

아들을 살려만 달라며, 그는 울부짖었다.

아들의 이름만 들먹여도 그는 울었다.

그는 3개월 정도 밤낮없이 눈물을 쏟았다.

자신의 눈물샘 속을 그때 다 비워냈을 성싶다.


그는 6년(2012년~2018년) 동안, 날마다 아들이 입원한 병원에 갔다.

그는 병원에 도착하여 아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응답 없는 아들에게 모노로그를 해댔다.

차라리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나았으리라. 그랬더라면 미세한 메아리라도 들렸을 것이다.

아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미주알고주알 아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해주었다.

아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전의 추억도 얘기했다.


그러다가 2018년 11월에, 병원 생활을 정리하고 아들을 집(본가)으로 옮겼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병원으로 가던 그의 발걸음은 그때부터 아들이 있는 본가로 향했다.




날이 새면, 그는 아침 식사를 한다.

과일, 구운 계란, 견과류, 찐 감자가 그의 아침이다.

혹시나 아내가 깰세라 그는 살금살금 아침 식사를 끝낸다.


매일 아침, 그를 보는 경비원은 시계를 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바로 걸어 다니는 시계였다.

그가 이 동네의 칸트였다.


본가로 가는 길 중간 쯤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그곳에서 그는 아침 산책 및 운동을 한다.

그 시간에 운동을 나오는 사람들이 있단다.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내심 서로 알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단다.

이사를 갔거나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란다.


본가에 도착하면, 그는 샤워를 한다.

런 후에 그는 아들의 재활 운동을 돕는다.

아들이 강직을 해대며 운동하기를 싫어하거나 잠들어 있기도 한다.

그래도 얄짤없다.

리프트 기를 이용하여 아들을 휠체어에 실은 후에 전동 자전거에 안착시킨다.

마치 산악 구조대가 환자를 헬기로 이송하는 장면과 흡사하다.

그는 아들의 재활 운동 매니저로서의 루틴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들이 전동 자전거를 타고 있을 동안에 활보쌤이 아들 곁을 지킨다.

아들이 소변이 마려워 버팅기거나 하품을 하면 자전거에 묶여있던 발이 풀린다.

그럴 때면 활보쌤이 다시 자전거 페달에 아들의 발을 찍찍이로 고정시키고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어떤 때는 별 일 없이 전동 자전거를 타지만 때로는 몇 번 찍찍이를 떼어버리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그럴 동안에 그는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를 켜고 하루의 일상을 시작한다.


아들은 전동 자전거를 탈 때야 비로소 침대를 벗어난다.

그 짬을 이용하여 침대 매트리스 커버를 교체하고 침상 정리를 한다.

침대 패드는 건조기의 '이불 털기' 코스로 돌린다.

재활 운동이 끝나면 다시 리프트 기를 이용하여 아들을 침상에 올려놓는다.


12년 간 재활 운동으로 다져진 아들은 근육이 거의 소실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은 면역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이탈이 양호하며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

물론 욕창도 없다.

중증 환자이지만 긴박한 상황이 없었다.

목관 튜브가 삽입되어  있지만 가래가 없어 석션기는 양치용으로 사용한다.

얼굴 빛깔이 좋아서 '환자계의 아이돌'이라 불린다.


그렇지만 아들은 여전히 인지가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변화가 없는 일을 반복하여 계속하는 일은 고역이다.

아들에게 매일 가는 그를 바라 보노라면 시지프스 신화가 연상된다.

시지프스는 무거운 바위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다.
바위를 정상까지 올리면 다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는 또다시 그 바위를 위로 밀어 올린다.
이 행위를 무한 반복한다.
이 형벌은 '의미 없는 일을 끝없이 무한 반복'하는 일의 고통을 잘 대변해 준다.

아들이 차도가 있다면 그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울 텐데... 아니, 신이 날 텐데...

플래토 현상*같은 절망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그의 발걸음이라니.


사고 이전, 건장했던 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과거는 일단 묻어둔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캄캄한 미래는 막막한 일이라 미리 당겨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날이 새면 용수철처럼, 태엽 감긴 시계처럼, 그는 아들에게로 갈 뿐이다.

아빠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외에 없기 때문이다.




아들은 네덜란드 교환학생으로 확정되어 있었다.

졸업 후 임관하는 공군 장교 후보생으로 합격해 있었다.

신체적, 정신적, 지적으로 준수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미 코마 상태의 중증환자다.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절망이다.


그는 날마다 그 절망에게로 간다.

희망을 향하여 가는 일도 12년이면 지칠 만한 세월이다.

절망을 향하여 걸어갈 수밖에 없지만 그는 아빠다.

아빠이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눈비가 오나 바람이 불어도 핑계치 않았다.

그는 아들을 향하여 갈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할까?

걸어가는 길에서 그는, 인생이 무엇인지? 그 해답을 알아냈을 것 같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거리를 걸으며 철학을 생각했단다.

그는 아침마다 인생이 만만치 않은 거로구나,라고 생각했으리라.





'아빠'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신의 하나님을 가늠한다는 말이 있다.

프로이트는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에 따라 신관이 결정된다”라고 했다.

육신의 아버지라는 프리즘은 하나님 아버지상(像)을 굴절시킨다. 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지 없는 아들에게 그 아빠는 어떤 프리즘일까?

아들은 아빠를 알아볼까?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자신에게 오는 아빠를 통해 아들은 신실한 하나님을 보고 있을까?

하나님 대신으로 아빠를 아들에게 보내신 것일까?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아들이 보고 있을 것 같다.

아들은 아빠를 통하여 하나님을 날마다 대면하고 있겠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빠를 통해 아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다.


사람마다 아빠에 대한 인식이 다를 것이다.

'아빠'라는 프리즘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인순이', '바다'가 콜라보로 부르는 <아버지>, 눈물 없이 시청할 수 없는 무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일을 하며 산다.

대부분은 그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다.

또한 사람들은 적어도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일터에 간다.

그러나 '그' 칸트는 아침마다 절망에게로 간다.


열 두해, 무보수로,
아들에게로 출근하는 그는
칸트처럼 '걸어 다니는 시계'다.




*'그'는 저의 남편입니다.

* 플래토: 학습 곡선에서, 일시적으로 진보가 없이 평평한 모양을 보이는 현상.

#칸트  #걸어 다니는 시계  #쾨니히스베르크 시계  #아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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