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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Sep 12. 2024

가는 날이 장날이듯

-  T로 시작하는 Timing(때맞춤)

마침내 에어컨을 켜지 않고 잠을 잤다.


한낮의 햇살은 여름과 진배없이 작렬하나 해가 지면 바람결이 다르다. 선선하다. 계절은 여지없이 가을인가 보다. 열대야만 아니어도 숨을 쉴 것 같다.

올해는, 역사상 최장기간 열대야가 지속되었던 해다. 숨 막히던 밤이 이제는 끝이 나려나 보다. 모두들 견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118년만, 38일째 열대야(관련기사)




미루고 미루었던 욕실 샤워부스 유리 물때 백화 현상을 제거하기로 했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딱 그날 청소를 하고 싶었다. 아마도 더위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것 같다. 일 년 전에 구비해 두고 베란다에 팽개쳐 두었던 유리 청소 도구들이 마치 청소할 날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나를 반겼다. 청소 도구를 챙겨 샤워부스에 들어갔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수돗물마저 미지근했다. 온몸은 땀범벅이 됐다. 이게 바로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건가? 그날 체감 온도는 39도나 됐다.

하필 그런 날 욕실 안 샤워부스에서 내가 청소를 하다니... 그때 내가 느꼈을 체감 온도는 45도를 웃돌았을 것 같다.

화장실을 5개나 청소합니다만 (화장실 샤워부스 유리 백화 현상 제거 하는 청소 팁. 필요한 도구를 구입해 놓고도 차일피일 미루며 샤워부스 유리 물때를 지우지 않고 지내왔다.)




그날도 얄짤없이 더운 날이었다.


그렇더라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 있다. 아들의 간병에 필요한 멸균 식염수를 구입해 둬야 했다. 날씨가 덥다고 그걸 사지 않고 선선해질 가을까지 미룰 일이 아니었다.

아들에게 필요한 대부분의 간병 용품은 온라인으로 주문한다. 그러나 의약품으로 구분된 것은 반드시 약국에구입해야 한다. 멸균 생리 식염수는 의약품이다. (그에 비해 렌즈 식염수 온라인 구매가 가능하단다. )

1L들이 식염수 10개를 한 번에 사곤 한다. 남편이 가방을 메고 가서 사 오든지 우리 부부가 함께 가서 나눠 들고 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내가 퇴임을 했기 때문에 시간 내기가 용이해졌다. 전적으로 내가 식염수를 사 나른다. 장바구니 핸드 카트에 담은 후 끌고 오면 제격이다. 아들은 가래가 거의 없기 때문에 식염수를 많이 사용하는 편은 아니지만 최소 15개 이상은 비상용으로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몇 년 전 아들이 코로나에 걸렸을 때 1L들이 식염수를 100개 정도 사용한 적이 있다.)


식염수를 구입한 후 약국을 나서는 순간,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짐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그냥 날씨가 찜통이었다. 겨우 한 블록 거리인데도 그랬다. 식염수를 사 들고 오기에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타이밍이 좋지 않을지라도 피치 못하고 반드시 어떤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뾰족한 수가 없다. 그거 한 상자 구입하겠다고 주차 공간도 여의치 않은 대로변 약국에 차를 끌고 가기에도 애매하다. 어쩔 수 없이 그 타이밍과 맞설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이 며칠간 백숙, 백숙, 이라며 노래를 불렀다.


치킨, 주물럭, 불고기, 갈비, 돈가스 등을 때때로 으며 사는데도 남편은 굳이 백숙 타령을 했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TV를 켜면 초기 화면에 'mbc every 1'이라는 채널이 나온다. 때마침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프로그램이 일주일 내내 재방송되고 있었다. 그 프로에서 백숙 먹는 장면이 나왔다. TV만 켜면 그들은 게걸스럽게 백숙을 먹어댔다. 그때부터 남편의 백숙타령이 시작됐다.


"백숙 맛있겠다. 백숙 맛있는데..."

"난 백숙은 별로던데..."

"이 사람아, 백숙이 얼마나 맛있는데, 저기 봐, 맛있겠잖아?"


남편의 백숙타령에 나는 시큰둥하며 들은 척도 안 했다. 폭염에 가장 하기 힘든 요리가 백숙이지 않는가? 삼복더위에는 '노 파이어 노 힛'(NO Fire, No Heat)을 구호처럼 외치는 나였다.


또한 그즈음에 우리 부부가 나란히, '미스터 션사인'이라는 드라마를 정주행 하고 있었다. 그 드라마를 볼 때마다 백숙을 먹는 장면이 몇 번 나왔다.


"저 사람들도 백숙 먹네."

"얼마 전에 삼계탕 가게에서 복땜 했잖아요."

"이 사람아, 삼계탕은 삼계탕이고 백숙은 백숙이지. 그래도 백숙이 제맛이지."


남편은 그러는 자기를 내가 얼마나 얄미워하는지 1도 모르는 눈치였다.



[배달앱에 나와 있는 백숙 가격표]

평소의 남편답지 않게 철없이 삼복더위에 백숙타령을 했다.


'에구, 내가 못 살아, 저 분에게 백숙을...'


폭염엔 백숙을 끓이느니 차라리 배달 시키는 것이 답이다. 배달앱을 살펴봤다. 그런데 백숙 값이 만만치 않았다. 퇴임하고 나니 그런 정도의 가격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까짓 거, 백숙 그거? 내가 하면 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 마트에 크고 작은 생닭이 냉장고에 즐비해 있었다. 튼실하고 좋은 토종닭을 한 마리 샀다. '만개의 레시피'를 검색하여 닭백숙 요리에 돌입했다. 닭을 손질하고, 냄비에 물을 붓고, 각종 재료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내가 따라 했던 압력솥으로 백숙 끓이기 레시피다.


[생닭을 손질한 후에 압력 밥솥으로 백숙을 끓이기 직전]

백숙 끓이기는 어렵지 않다. 다른 요리에 비해 심플하다. 그러나 아무리 압력 밥솥으로 끓이면 시간이 덜 걸린다 해도 집안에 한 동안 열기를 뿜어 대야 한다. 주방은 사우나처럼 변해 가고, 나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거실 에어컨을 켜 놨지만 창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인지 후드로 냄새를 다 빼낼 수 없으니 양쪽 창문을 열고 맞바람으로 냄새와 열기를 빼야 했다. 백숙 끓이는 열기와 찜통 더위가 어우러져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끓인 백숙은 다행히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어봤던 백숙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남편도 맛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얄미워서 꿀밤이라도 하나 놓고 싶었다.


'맛있으면 실컷 드셔~'  


하필 그날도 체감 온도 39도였다. 불을 켜고 백숙을 끓이던 그때의 주방 체감 온도는 가히 짐작이 된다.


올해 딱 두 번, 체감 온도 39도였는데 그 날을 골라 잡기나 한 듯이 땀 흘리는 일을 했던 내가 주책이다.




욕실 부스 유리 백화 제거 청소나 백숙을 끓인 날은 더위의 절정이었으니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그러나 아들에게 필요한 식염수를 사는 일은 무더운 날씨였더라도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은 때가 있는가 하면 타이밍에 연연하지 않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있다. 또한 어떤 일을 했을 때 그때가 절묘한 타이밍일 때도 있다. 적시타 [適時打]라는 말이 있다. 절한 점에 나온 안타. 야구에서, 주자가 에 나가 있는 상태에서 투구를 쳐서 타점을 올리는 안타를 말한다. (나무위키 참조)


우리의 삶은, 나름의 때가 있다.


이번 여름에 생각 없이 들입다 했던 일 때문에 낭패를 봤다. 이런 걸 두고 '가는 날이 장날'(That's bad timing)이라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미루어 둘 수 있는 느긋함을 연습해 둬야겠다.


성경의 '전도서'에, 모든 일에 때가 있다고 했다.


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내가 더위를 먹었을까? 하필 폭염이 절정이었을 때에 일을 벌였던 것이 후회막급하다. 정신 좀 차리자.


인생사, 모든 일에
때가 있다.
적시타의 삶이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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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날이 장날   #That's bad timing.  #샤워부스  #백화 현상  #닭백숙 #체감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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