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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Oct 17. 2024

호모 파베르, 만세!

T로 시작하는 Tool(도구)

중증환자를 오랫동안 케어하다 보니 반의사가 되었다. 12년간 나는, 중증환자 아들을 간병하는 최일선에 있다. 구비해야 할 것도, 할 줄 알아야 할 것도 무수히 많았다. 아들 간병에 관한 모든 일에 내 손이 닿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 와중에 내가 해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아들의 눈에 끼워둔 렌즈를 빼는 일이다. 그 일을 반드시 해내고 싶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아들을 돌보는 일 중에서 렌즈를 빼는 일보다 더 힘들거나 정교한 일도 있다. 유독 아들의 각막에 있는 렌즈를 빼는 것은, 그 일에 트라우마가 있기나 한 것처럼 손가락이 오그라든다. 눈이라는 게 예민한 곳이라 그런가? 아니면? 아들의 고통이 곧 나 자신의 아픔이라 그럴까? 


인지 없는 와상 환자들은 대체적으로 눈 깜빡이는 횟수가 정상인에 비해 적기 때문에 각막에 낀 눈곱이 마른다. 건조해진 눈곱이 각막을 손상시킬 수 있다. 그래서 그런 환자에게는 의료용 렌즈를 끼워 준다. 환자용 렌즈에는 미세한 구멍이 많이 있단다. 시력 교정보다는 각막 보호의 의미로 만들어진 렌즈이다. (이 정보는 '카더라' 통신에 의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아들이 재활요양 병원에 수년간 입원해 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 렌즈를 빼거나 낄 수 있는 간호사가 단 한 명뿐이었을 정도로 그 일이 쉽지 않다. 아들의 렌즈 교체 시기는 그 간호사의 근무일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렌즈를 갈아 끼울 때 환자가 눈을 감아 버리거나 마구 깜박이기 때문이다. 


병원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옮겨 온 이후(벌써 만 6년의 시간이 흘러 감)에는 L샘만이 렌즈를 뺄 수 있었다. 아들의 렌즈를 교체해야 할 시기가 되면 L샘이 렌즈를 먼저 뺐다. 그런 후에 3인조가 한 팀이 된다. 한 사람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도록 턱을 잡고 다른 한 사람은 눈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뽁뽁이에 올린 렌즈를 재빨리 환자의 각막에 올려놓는다. 이때 세 사람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하나, 둘, 셋, 을 외치며 렌즈를 끼운다. 나로호 발사도 아니건만 카운드다운을 하며 맘을 졸일 일인지. 제대로 되지 않아 다섯 번이나 다시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들은 오만상을 찡그리고 고통을 호소하곤 했다. 그런데 5년간 아들의 활동보조사로 근무하던 L샘이 개인 사정으로 지방으로 이사 갔다. 섭섭한 맘은 둘째치고 렌즈 빼는 일 때문에 걱정이 됐다. 


렌즈를 빼려고 내가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실패였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렌즈를 갈아 끼워야 하는데 대략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렌즈를 빼기 위해서 지방으로 이사 간 분을 불러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H샘, S샘이 어찌어찌 렌즈를 뺀 적이 있긴 했다. 때로 아들이 고개를 옆으로 쳐 박을 때 저절로 렌즈가 빠져나올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렌즈 빼는 일이 생략된다. 아들의 눈이 빨개지며 새벽에 눈곱의 양이 많아지거나 눈이 아프다고 찡그리면 교체 시기가 아니어도 갑자기 렌즈를 교체해줘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당장에 곁에 없는 그분들을 부를 수는 없다. 남편이나 내가 렌즈를 뺄 줄 모르니 그게 문제였다. 아무 때라도 렌즈를 교체할 수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 걱정이 나를 짓눌렀다. 묘안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기술을 어디서 익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출처:쿠팡, 렌즈 착용 도구]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S샘이, "아, 렌즈를 뺄 수 있는 집게가 있대요."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렌즈 도구 케이스에 담긴 집게로 렌즈를 용기에서 들어 올려 뽁뽁이에 올린 후에 눈에 넣긴 했다. 그 집게로 렌즈를 집어서 들어 올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자꾸 미끄러지고 잘 잡히지도 않았다. 또한 뽁뽁이의 나팔 부분에 렌즈를 올려놓은 후에 그걸 눈에 넣으면 때때로 렌즈가 뽁뽁이에 흡착되어 다시 딸려 나오기도 했다. 하여튼 렌즈를 빼기도 어렵지만 끼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유튜브 영상으로 여러 가지 방법의 렌즈 빼는 요령을 익혔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인지 없는 아들에게 적용하기에는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렌즈 빼는 도구가 있다고 하는 말이 내겐 굿뉴스처럼 들렸다. 당장 폭풍 검색했다. 검색어는 '렌즈 빼는 도구'로 입력했다. '왜 그걸 여태 몰랐을까'? 스스로 자책했다.

드디어 찾았다. 


[콘택트 족집게로 렌즈를 쉽게 빼낼 수 있다.]


 '렌즈 빼고 끼는 도구'는 실리콘 재질이었다. 렌즈를 소독액에서 떠 올리는 미니 스쿠퍼, 렌즈를 빼는 콤팩트 족집게, 렌즈를 올려놓은 후 끼우는 뽁뽁이가 한 세트로 되어있었다. 


1) 눈에 장착된 렌즈를 실리콘 콘택트 족집게로 뺄 수 있다.  

2) 보관 용액에 담겨 있는 렌즈를 스쿠퍼로 떠 올릴 수 있다.

3) 렌즈를 뽁뽁이의 나팔 부분에 올린 후에 눈에 낄 수 있다.


여러 가지 브랜드를 검색한 후에 맘에 드는 것을 골랐다. 뽁뽁이 흡착봉과 콘택트 족집게는 구원투수처럼 반가웠다. 바로 내가 그토록 힘들어했던 렌즈 빼는 일을 그냥 해낼 수 있는 찰나가 왔다. 우리에겐 신박한 도구인 셈이다.


"ㅇㅇ야, 걱정 마, 엄마가 이제 한 방에 렌즈를 뺄게."


구입한 도구는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단 한 번에 렌즈를 뺄 수 있었다. '모름지기 우린, 도구를 이용할 수 있는 인간이야' 라며 학창 시절에 배웠던 호모 파베르라는 말을 되뇌었다. 


렌즈 탈·흡착 도구를 만났으니 이제 나는 아들의 간병에 관한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있게 됐다. 만능 간병사가 되었다.



호모 파베르, 만세다!




* 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도구의 인간을 뜻하는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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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베르 #렌즈  #도구  #간병  #족집게  #뽁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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