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디 여사님을 만나다
L 집사는 내 아들, 임찬양을 그토록 좋아했던 후배가 있는데, 그 후배의 어머니다. 그분은 김장환 목사(1934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적 꿈은 정치인으로, 너무 가난하게 사는 자신의 현실이 싫어 정치가가 되면 뭔가 생활이 나아질 것 같아 꿈으로 고르게 됐다고 한다. 한국 전쟁 때 미군부대에 들어가 하우스보이로 일하면서 영어를 배웠다. 미군 상사의 도움으로 휴전 후인 1958년 밥 존스 대학교로 유학하여 미국인과 결혼하고 미국에서 침례회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 후 귀국하여 1960년 3월 수원 중앙 침례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1970년에 극동방송 한국 지부 설립에 깊숙이 관여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제주 극동방송(구 아세아방송)을 개국하기에 이른다. 미국 기독교, 정계와도 깊게 인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계에서 자연스레 큰 권한과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극동방송 사장, 이사장 등 여러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는 침례회 세계연맹 총재를 맡았으며, 극동방송에서는 2008년부터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영결식 기독교 종교의식을 집례 했다.-출처: 나무 위키)의 첫째 아들이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하는 분이다.
L 집사는 찬양이의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몹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셨다. 곧바로 지인들에게 찬양이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중보기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L 집사가 속한 단톡방에서 십시일반으로 후원을 하자는 의견이 모아진 모양이다. 15명 정도가 찬양이의 치료비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각자가 후원금을 자율적으로 정해서 개미 군단처럼 후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수술비, 병원비, 간병비 등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기 때문에 한강의 자갈로도 감당이 안될 상황이었다. L 집사가 발 벗고 나서 주니 우리 가정의 환란을 위해서 예비된 천사가 아닌가 싶었다. L 집사는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도 기도를 부탁했던 것 같다. 그 교회에서는 오후 예배 시간에, 찬양이 사고 경위 등을 전하는 간증을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었다.
남편은 성인군자형(MBTI유형으로 치자면 ISFP)으로 무척 내성적인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싫어한다. 아니 싫어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한다. 특히 다른 교회에서 설교를 좀 해달라는 부탁을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저는 부족해서 그런 거 못해요.'라고 했었다. 그런데 찬양이가 사고를 당한 후에, '하나님 아들만 살려주신다면 뭐든지 할게요.'라고 하나님과 약속을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 사고 이후로는 틈틈이 그런 간증이나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이 오면 거절하지 않았다.
그 교회에서 간증을 마치니 김요셉 목사님은 우리를 트루디 사모님의 파이 가게로 데려갔다.
그렇게 우리는 트루디 사모님을 만났다. 파이 가게에서 트루디 사모님이 정성껏 구운 파이를 대접받았다. 꿈만 같았다. 방송을 통하여 트루디 사모님을 알고 있었는데 아들의 사고로 인하여 직접 만나보는 길이 열렸다. 인생이란 게 참 신기하다.
찬양이 친구, 의사 Kim
찬양이의 친구 Kim은 조용하고 말이 없었다. 포항공대에 다니더니 의전에 진학하여 지금은 의사가 됐다. 그 조용한 친구는 말없이 자기 급여의 1/20을 묵묵히 찬양이에게 보내온다. 1년 전엔가 결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친구를 향한 후원은 여전하다. 아마도 젊은 나이에 덜커덕 병상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서 그 후원을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진정한 친구는,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고 비록 잠자듯이 누워있는 자 일지라도 묵묵히 동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찬양이 친구, 의사 Kim을 통해서 알게 됐다.
고향 친구 P
내 고향 친구 P는 찬양이가 사고 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자동 이체를 해두고 매달 자그마한 후원금을 보내오고 있다. 아들이 병원 생활을 마감하고 집으로 오고부터는 지출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이제는 후원을 그만둬도 되겠다고 연락을 했었다.
"찬양이가 일어나는 날까지 계속하겠다. 친구의 아들은 곧 나의 아들이야. 한 번 마음먹었으니 그것은 변할 수 없다."
라고 친구는 문자를 보내왔다.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나는 그런 친구가 못 되었는데... 친구란 이런 것이었나 보다. 친구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런 맘을 보여주는 것인가 보다.
익명의 후원자들의 응원
종종 익명의 후원자들이 있었다. 그분들의 마음을 분석해보면, 받는 우리가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 같다. 작은 것을 행하고 공치사를 과하게 하는 시대에 익명으로 응원을 보내는 자들의 마음은 참 따끈하다. 그들이 보내온 입금자 란에는,
# 기도합니다~
# 예수 이름으로~
# 사랑합니다~
# 힘내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천사는 아마 얼굴이 없을 것 같다. 천사는 손과 마음만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때로는 절망이 되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즈음에 우리의 발이 나락의 늪에 닿지 않도록 후원으로 격려를 보내오곤 했다. 어둡고 칙칙한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났을 때, '띵동' 소리와 함께 익명의 후원자가 보내오는 입금자 란의 "힘내세요"라는 멘트는 참으로 에너지처럼 우리에게 기운을 돋워 준 적이 꽤 있다.
저렇게 많은 분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보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들의 숨결을 느끼며 그분들의 격려 소리를 들으며 걸어올 수 있었다. 오늘도 발걸음이 가볍다.
[사진 출처: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