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겨울 어느 날 엄마는 맞벌이라 자주 안 하시던
요리를 (닭볶음탕으로 기억한다) 해주시고는
교회를 가신다고 집을 나서셨다.
그게 엄마와의 마지막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교회동료 분과
함께 차로 돌아오신던 중
교통사고로 한강다리에 차가 추락했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당시 내 나이는 7살이었고 어린아이에게는
아무도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다만 어른들은 우리 남매를 보자마자 안고 어떡하냐며 울기만 했다.
나는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어른들이 모두 다 울고 있었고
나는 그저 황당하고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파주 용미리에 묻혀 계시는데 아주 높은 곳 경치가
좋은 곳에서 쉬고 계신다.
엄마를 묻으러 가는 날에는 비가 아주 많이 왔는데
관을 메고 올라가신 어른들이 고생을 아주 많이 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우리 남매는 엄마 없는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아빠는 언제나 그럿듯 사라졌다.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엄마 조의금까지 몽땅 들고 사라져
많은 어른들이 낭패를 보았다고 한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 도박을 하신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큰돈을 들고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아빠는 아주 가끔 집에 돌아왔다.
빈손으로 돌아온 그는 집에만 있었다.
돈은 야채노점상을 하시는 할머니의 수입과
기초생활 수급자로 국가에서 주는 얼마 안 되는 금액으로
네 식구가 연명했다.
아빠는 몇 주 집에 있다가 어느 날 또 홀연히 사라졌다.
부모님의 부재는 피부로 느껴졌다.
학교에 처음 등교하는 날 모두 부모님과 함께였지만
나는 혼자였다.
그렇게 나는 모든지 혼자 해야하는 아이가 되었다.
한 번은 누나와 놀이터에서 놀다가 동네 아이와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 아이의 엄마가 누나만을 혼내자
누나는 울며 악을 쓰며 집으로 갔고
내가 동생인걸 몰랐던지 내 앞에서 저 애가
부모가 없어서 저렇게 싸가지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남의 입으로 처음 들은 완벽한 각인이었다.
'부모 없는 아이'
그 날 이후로 나에게 평생 쫓아오는 꼬리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