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읽다 쓰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 <에브리맨> 중에서. -
첫 책이 나오기 전의 일이다. 원고 의뢰를 해온 잡지사에서 이름 뒤에 뭐라고 쓰면 되냐고 물었다. 이름 뒤에 붙는 직업,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격을 묻는 거였다. 나는 이름만 쓰면 안되냐고 되물었다. 안된단다. 그냥 작가라고 쓸 수는 없다며, 무슨 작가냐고 물어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소개말은 ‘사진 찍고 글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껏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반드시 다시 물어본다. 전공이 사진이에요? 시인이세요? 소설가에요? 언제 등단했어요?
결국, 무슨 작가예요? 라는 질문은 작가 맞아요? 등단했어요? 라는 질문이다. 즉, 등단하지 않았으면 작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대회에서 입상하거나, 책을 내거나, 개인 전시회를 했거나 하는 자격이 있냐는 말이다. 등단하지 않았으면 시인이 아니고, 사진가가 아니고, 작가가 아니고, 예술가가 아니라는 거다. 우리나라는 호칭에 민감하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작가라는 호칭을 함부로 사용했다간 작가협회를 비롯하여 무수한 곳의 항의 전화를 받을 수도 있다. 자칫하면 작가를 사칭한 사기꾼이 된다.
그럼 작가라는 이름을 쓰지 않으면 되지 않냐고?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게 또 문제다. 시인도 아닌데 왜 시를 쓰냐고, 사진가가 아닌데 왜 전시를 하냐고, 예술가가 아닌데 왜 예술을 하냐고 다시 질문을 퍼붓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신 글을 왜 읽고, 당신 작품을 왜 봐야 하냐고 하는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쉽지 않다.
나는 제주에 이주한 후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실 이 말은 소개 자리에서 이름 다음으로 해야 하는 말이다. 우리는 항상 언제부터인지를 물어보니까. 언제부터 제주에 살았나? 언제부터 사진 찍었나? 언제부터 글 썼나? 물론 이 모두가 경력과 자격을 가늠하기 위한 질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필수적인 질문-“왜?” 왜 내가 제주에 왔냐 하면, 살고 싶은 곳에서 살기 위해서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였다. 뒤집어 말하면 아무 대책도 없이 제주에 왔다. 친구가 이제 뭐하고 살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여행작가가 되고 싶어, 라고 했다. 그전에는 여행작가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정말이지 생뚱맞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무튼 왜 하필 여행작가였냐면, 나는 여행이 좋았고,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헌데 여행작가라는 말을 입에 올리니 사람들은 또다시 자격증이 있냐, 여행작가협회에 등록했냐고 물었다. 나는 여행작가협회에서 하는 강의를 들으러 달려가지 않았다. 그냥 카메라를 샀다. 나는 용감무식하니까. 나는 여행작가라는 이름을 갖고 싶었던 게 아니라, 여행하면서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그리고 책을 냈다.
내 말을 오해하면 곤란하다. 책을 냈으니 작가라고 말하려고 책을 낸 게 아니라, 작가가 아니어도 시를 쓰고, 사진을 찍고, 책을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책을 냈다.
시인이 아니었지만 시를 쓰고 싶어서 시를 썼고, 사진가가 아니었지만 사진 찍고 싶어서 찍었고, 전시를 했고, 작가가 아니었지만 책을 내고 싶어서 책을 냈다.
시인만 시를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작가만 작업을 하고 예술가만 예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작업을 하고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이 작가고 예술가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책을 냈다.
기억나는 우화가 있다. 한 사람의 생이 끝나 죽은 이들의 세상으로 갔다. 가다 보니 문 앞에 고급공무원이 앉아 있다. 명부에 등록해야 한다고 한다. 그가 묻는다. “너는 누구냐?”
“저는 주부입니다.”
“나는 네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65살의 여성입니다.”
“나는 네 나이와 성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대한민국 서울 사람입니다.”
“나는 네가 사는 곳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정치가의 아내입니다.”
“나는 네 남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교수의 딸입니다.”
“나는 너의 부모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나는 너에게 자식이 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 대학을 졸업했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일을 했고,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았고, 남편의 일을 도왔고, 한 아이를 박사로, 한 아이는 예술가로 키웠습니다.”
“나는 네게 주어진 생을 어디에 쓰다 왔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저는..제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앞에 했던 말들이 답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 내가 누군지 말하지 않고 남들이 부여한 것들-역할과 호칭만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빛나 보이는 이름들이라 해도, 남들에게서 받은 것들로는 ‘나’라는 어떤 정체성도 생기지 않는다.
리어 왕은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냐’라고 한다. 답은 ‘나’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부여한 이름이 아니라 나 스스로 누구인지 말하는 내가 ‘나’다.
그리고 내가 나일 수 있는 정체성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만들어진다. 좋아하는 일, 즉 창조적인 일, 예술적인 일을 할 때 내가 즐겁기 때문이고, 그때 진짜 내가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우화 속의 여인이 “나는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걸 좋아하고, 몸치지만 혼자 춤추는 걸 좋아하고, 솔방울과 소라를 주워다 방을 장식하는 걸 좋아해요. 그게 나에요.”라고 대답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다. 그건 내가 책을 냈기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 부여한 나의 정체성이다.
여러분과 나, 우리는 모두 작가고, 예술가다. 우리는 창조적인 일을 할 때 즐겁다는 게 그 증거다. 예술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그때 진짜 내가 나온다.
그러니 바로 지금 하고 싶은 작업을 하시라. 그게 무엇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음악이든 춤이든 요리든 뜨개질이든 무엇이든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시라. 지금 당장 시작하시라. 영감을 기다리지 말라. 우리는 예술가는 타고나는 것이고, 재능과 영감이 있어야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영감이 예술을 하는 게 아니다. 천재로만 보이는 필립 로스도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언제였더라, “글을 쓰는 건 영감이 아니라 마감”이라던 최갑수 작가의 포스팅을 보고 빵 터졌던 적이 있다. 뮤즈를 기다리지 말란 말이 아니라, 뮤즈가 올 때까지 손을 놓고 기다리지 말란 얘기다. 뮤즈는 일을 하는 중에 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오는 것이 아니다.
영감이 창조의 원천이긴 하지만, 영감이 글을 써주지는 않는다. 글은 내가 쓴다. 예술을 하는 건 ‘나’이다. 그리고 예술을 하는 여러분과 나,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지금 당장 ‘나의 일’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