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지지자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를 읽다 쓰다

by 시린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이 생활고와 싸우면서 그냥저냥 시간을 파먹고 있던 그 풋내기 시절, '누군가'가 나를 후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엄청난 격려가 되었다. 존은 나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밝힌 첫 번째 사람이었고, 나는 그 고마움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빵 굽는 타자기> 중에서.-


'누군가'가 생각난 건 아니다. 다만 그 마음만은 내 일인 양 절절히 느낄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절대적인 지지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예술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신뢰받아 본 적 있었던가?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잘 생각해볼 일이다. 찬찬히 돌이켜 보도록 하자. 나를 믿어주는 마음을 모르고 지나친 건 아닌지. 그렇다면 너무 미안한 일이니까. 그런데 자꾸 무시 받았던 기억만 불쑥불쑥 올라와서 묵은 기억을 들쑤시는 게 그만 싫어지고 만다. 인정받고 싶어 한 적 없다. 내세울 것도 없지만 나서는 건 체질이 아니다. 그렇게 없는 듯 한구석에서 조용히 지내길 원했건만 끝내 나를 끄집어내어 두들겨 패는 건 늘, ‘잘난 척’이라는 비난이었다.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한 명, 단 한 명의 나를 지지하는 사람만 있어도 용기가 날 거라는 걸.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가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나에게는 없는 일인 모양이라고, 말수는 줄기만 했다.

이십 대 초반의 어느 날. 엄마 집에 잠시 와 있던 밤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게 밖으로 나갔는데 -추석이나 대보름이었던 걸까?- 보름달이 눈높이에 떠 있었다. 말끄러미 바라보다 소원을 빌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말이 하고 싶다고 빌었다. 그 후로도 몇 년쯤을 더,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가 단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입을 여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언제 누구에게 어떤 비난을 받을지 몰랐다.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양 바보 행세를 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대학원생 쯤으로 보이는 약간 연상의 여성이었는데, 나를 보며 불쑥 물었다. 그 책, 재미있어요? 워낙 좋아하는 작가라서, 우물우물, 버벅거리는 내 말을 웃음으로 자르며 다시 말했다. 나도 맥주 하나 줘 봐요.


부산에서 대구까지였나,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 어찌 갔는지 모르게 이야기를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니. 책과 술과 타향살이와 연애와 기타 등등 시시콜콜한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르다니.


그걸로 끝인 인연이었다. 허나 여운이 긴 만남이었다. 그이가 내린 후 서울에 도착하도록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후로 몇 번인가, 달이 내 소원을 들어주려고 잠깐 모습을 바꿔 기차에 탔던 건가 상상해보곤 했다. 이 말인즉, 이후로는 또다시 오랜 날을 대화 상대가 없는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는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다.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모르는 사람과도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서로에 대한 사전지식이나 선입견이 없는 상대가 때로는 지인보다 나은 대화 상대가 된다. 또 하나 마음을 놓게 하는 것. 상대의 평가와 비난에서도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다.


나는 나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달에 소원을 빌 때 친구보다 더 간절히 바랐던 건 솔직하고 싶다는 기도였다. 어떤 과장이나 위로도 하지 않고 자기를 똑바로 보고 싶었다. 잘난 척 아는 척, 척한다는 비난은 나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슬픔을 과장하고 있는 건가. 제멋에 겨워서 슬픔에 빠진 척하는 건 아닌가. 시를 쓰는 것도 단지 시인이라는 이름이 멋지게 들리기 때문이었던 걸까.


한마디도 쓸 수 없는 날이 길어지고 있었다. 거짓말의 시를 쓰게 될까봐. 지금의 절망이 진짜 절망이 아니고 젊은 날의 허세에 불과하다면, 서른이 넘은 후에, 십 년쯤 후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쓸 수 있게 될 거라고 합리화를 했다. 미래에 대해서마저도 솔직하지 못했던 거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내 것이었던 적 없고 미래를 꿈꿔본 적 없었으니, 달 아니라 무엇에 빈 소원인들 구체성이 없는 빈말에 불과했던 거다. 그런데도 달은 내게 메시지를 보내 주었으니, 내가 끝내 쓰는 일을 놓지 않은 건 모두 그 덕이다.


단 한 명의 지지자. 변함없는 지지를 내게 보내주는 그이는 그날처럼 오늘도 하늘에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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