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다 쓰다
인간은 왜 불안하지? '불안하니까 사람이다' 따위의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말자. 그 전에, 우리 나라에서 꽤나 인기 있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을 슬쩍 컨닝해 보자. 읽은지 너무 오래 되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니까. 그가 뭐라고 했더라? 물건을 소유할수록 불안은 더 커질 뿐이라고 했던가? 없어도 불안하고 있어도 불안하다면, 없는 것이 나을까 있는 것이 나을까?
열흘 정도 전, 그러니까 폭염이니 열대야니 하는 말이 징그러워지기 시작한 복날 한가운데쯤 되는 날이었다.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아침에 물을 마시려고 열었더니 더운 공기가 훅 끼치고 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A/S 접수를 하니 수리 건수가 한참 밀려 일주일은 기다려야 한단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다음날 A/S 기사가 전화를 해서 묻기에 냉장고 상태를 얘기하니 주요부품이 열을 받은 모양이란다. 전원을 한동안 껐다 켜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안 되면 부품을 교체해야 한단다. 비용은 20만원이 넘을 거라고 했다. 산지 4년이 채 안된 냉장고인데 어째 억울하다. 게다가 열 받을 만큼 무리해서 일을 시킨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용물이 공간의 반도 채우지 못할 때가 많은데. 아무튼 그건 내 사정이고, 그만큼의 비용을 들여 수리를 할 바에야 새것을 사는 게 낫다. A/S 접수는 취소했다.
새 냉장고를 사려면 얼마 정도 들까. 중고매장에 가볼까. 저 냉장고는 어떻게 버리지. 아니 그 전에 안에 든 음식을 처리하는 게 먼저구나. 냉동실에 얼려뒀던 밥과 상하기 쉬운 달걀, 우유를 그날로 먹어치웠다. 다른 음식들도 빨리 상할 만한 것부터 처리하고 일부는 버렸다. 사흘 후 냉장고엔 고추장과 물만 남았다.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서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냉장고가 꼭 필요한가?
생각해 보자. 나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먹지 않는다. 끼니를 거르진 않지만 있는 재료로 한번 먹을 만큼만 간단히 만들어 먹는다. 장을 볼 때도 오래 먹자고 이것저것 사두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먹고 싶은걸 사는 편이다. 그러니 음식이 냉장고에서 몇 달씩 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사흘 만에 냉장고가 빈 걸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실 잘 생각해 보면 냉장고에 들어 있는 대부분은 당장을 위한 음식이 아니다. 먹고 남은 과거의 밥이거나, 언젠가를 위해 미리 넣어둔 미래의 밥이다. 당장 먹을 밥을 만드는 데 냉장고가 반드시 필요하진 않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그렇다는 말이다. 잔뜩 사서 남기거나 미리 사두려 하지 말고 필요한 만큼만 사면 된다. 그래서. 냉장고 없이 버틸 수 있는 만큼 살아보기로 했다. 며칠을 못 참고 차가운 물과 맥주가 먹고 싶어서 하이마트로 뛰어갈지도 모르겠지만.
잊고 있었는데, 어릴 때 우리 집엔 가전제품이 별로 없었다. 세상이 지금처럼 전자제품으로 둘러싸이기 전이었고 우리 집은 특히 가난했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터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냉장고가, 세탁기와 TV와 에어컨과 청소기가 필수품이 된 걸까. 뭐 나는 지금도 없는 게 더 많긴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필수품이 된지 오래다. 그런데 이 필수품이라는 말이 묘하다.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말인데 정말 그런가? 물론 있으면 생활이 훨씬 편하다. 이불빨래를 손으로 해본 사람은 다 알거다, 얼마나 힘든지. 하지만 힘이 들뿐 세탁기가 없어도 (당연히) 살 수 있다. 집안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물건이 그렇다. 없으면 불편하긴 하지만 못 살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필수품이란 꼭 필요한 물건이라기보다 남들에게 있기 때문에 나에게도 있어야만 하는 것들을 말한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가진 건 나도 가져야 하고, 그러지 못했을 때 우리는 불행해한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 갖춰야 하는 필수품이 된 거다.
냉장고가 고장 났다고 하니 사람들은 이 더위에 어떻게 사냐고 놀라며 내가 불쌍하단다. 좀 부끄럽기도 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뭐가 부끄러운 거지? 나는 왜 자꾸만 남들에게 있는 걸 갖지 못했다고 불행해하는 걸까.
정신 차리고 다시 질문해보자. 냉장고가 없는 나는 불행한가? 왜 불행한가? 다른 사람들은 다 있으니까, 라는 게 이유라는 건 이상하다. 내가 냉장고를 산다면, 내가 필요한 냉장고를 내 돈을 주고 사는 거다. 소유하는 것도 물론 나다. 냉장고를 사서 행복해지든 없어서 불행해하든 원인은 나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 간단한 걸 자꾸 잊어버리다보니 늘 만족이 없고 불행하다. 그토록 바라던 걸 가진들 처음부터 나에게 꼭 필요한 게 아니었다면 행복하지 않은 건 당연하다.
심각한 척 하고는 있지만, 나도 물건 하나 살 때마다 이렇게 고민하는 건 물론 아니다. 이야기가 다소 멀리까지 간 건 그저 냉장고가 제법 비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이든 사라진 뒤에 의식하듯, 시원한 물이 없으니 예전엔 어땠었나 생각하게 된 거다.
무언가를 바라다보면 바라는 대상만 남고 내가 없어지곤 한다. 바깥만 보느라 내 존재를 잊어버리기에 불행해진다. 아름다운 물건을 아무리 많이 가진들 내가 아름다워지는 건 아니니까.
그럼 이제 다시 질문해 보자. 내가 바랐던 게 무엇이었는지.
내가 바랐던 건 밖에서 끌고 들어 온 스트레스와 열대야를 잠시 잊고 숨 돌리는 시간.
차가운 맥주를 꺼내 마시며 잠깐의 행복을 느끼는 나의 모습이었다. 냉장고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