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싸는 시간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을 읽다 쓰다.

by 시린

저는 단편 <순수의 노래, 경험의 노래> 첫 부분에서 “내게는 이런 습관이 있다”고 썼습니다. “외국에 나가, 일 때문에 체류할 때를 포함해 꽤 긴 여행을 떠날 때마다, 낯선 풍경 속에 뿌리 없는 풀이 된 내게 닥칠 수 있는 위기를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도록 - 적어도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가지 준비는 하고 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준비를 하는 건 아니고) 그저 바로 전부터 쭉 읽어오던 책을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 <읽는 인간> 중에서. -


짐을 싸는 건 즐겁다. 야반도주가 목적이 아닌 바에야, 여행을 위한 짐을 챙기는데 즐겁지 않을 리가 있나. 신이 나서 하다 보니 이제는 가방 싸는 게 재주가 되었다.


제일 먼저 챙겨야 할 게 칫솔, 양말, 속옷. 어디 가면 칫솔 챙기는 거 잊어버려서 편의점 찾는 사람, 꼭 있다. 기억하는 한, 나는 그런 적은 없다.


쓸 일이 있을까 싶지만 꼭 챙겨야 할 것. 일회용 밴드와 종이 반창고, 옷핀. 여행지에서 약 있느냐 서로 물어보는 사람들도 늘 있다. 진통제와 소화제, 붙이는 파스. 그리고 여러 장의 비닐백. 비닐을 쓸 때마다 죄책감이 밀려오긴 하지만, 이만큼 가볍고 얇고 유용한 물건이 없다는 게 또 문제. 요즘은 종이봉투, 천 가방, 비닐백을 고루 사용하려 애쓰고 있다.


우산보다는 비옷. 다들 필요 없을 거라더니-난데없는 스콜이 퍼붓던 동남아 어느 도시의 건물 처마 밑에서, 발이 묶인 모든 여행자들이 내가 입은 비옷을 가리키며 어디서 샀냐고 부러워했었다.


버리지 않고 두었던 낡은 옷을 챙긴다. 한번 입고 버리면 빨래와 짐을 줄일 수 있다. 두꺼운 옷 한 벌보다 가볍고 얇은 옷 두세 벌이 좋다. 얇고 넓은 천과 편한 슬리퍼도 필수 아이템. 천은 추울 때 망토나 머플러로, 햇빛 가리개로, 급할 때 수건으로, 짐을 담는 보자기나 끈으로, 바닥에 깔아 식탁보와 돗자리로, 기타 등등 다양하게 써먹을 수 있다.


무얼 챙기느냐 만큼 중요한 게 어디에 담느냐이다. 필요한 물건을 바로바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립밤 하나 찾겠다고 가방을 뒤집어 밑바닥에 있는 짐까지 몽땅 꺼내거나, 그러고도 결국 찾아내지 못한다면 없는 것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무엇부터, 어디에 넣을지 전략을 잘 짜야 한다. 짐의 배치와 순서가 부피와 무게를 좌우한다. 빈 공간은 조금도 없어야 한다. 무거운 건 위쪽으로 올린다.


멀리 가거나 일주일 이상 머무르는 여행이라면 나는 대개 캐리어에 백팩 하나를 갖고 간다. 짧은 여행이라면 큰 가방 하나로 충분하다.

캐리어와 백팩에 머무는 날짜만큼의 옷과 비상식량, 노트와 이어폰, 여행용 포트와 텀블러까지 꾹꾹 눌러 담는다.

도저히 다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짐들을 차곡차곡차곡차곡 접어 넣고 말아 넣고 끼워 넣는다. 여기까지가 1단계.


2단계는 소리와 글 챙기기. 하나, 음악. 둘, 책.

먼저 mp3를 채운다. 일단 이번 여행의 ‘분위기’를 정한다. 계절과 장소,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생각해 보고 싶은 것들과, 필수는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찾고 싶은 떠남과 돌아옴의 목적 등을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면 바다가 한 방울씩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듯, 한 방울씩 떠올라 구름처럼 펼쳐지는 분위기가 있다. 그 구름의 색과 모양을 상상하며 음악을 담다 보면 어느새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되어 있다. 제목도 붙여 본다. ‘여행의 분위기 ; OO’


자, 이제 가장 중요한, 진짜 ‘짐’을 싸야 한다. 말해 뭐해. 책 말이다.

당일치기라면 읽던 책을 챙겨가면 그만이지만, 1박이라도 한다면 고민은 깊어진다. 책장 앞에서 오래 머문다. 내가 짐을 싸면서 가장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 시간이다. 어떤 책을 가져갈까. 무엇을 읽을까. 누구를 만날까.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말, 무엇을 찾을 것인가. 이를 한두 권의 책으로 결정해야 한다. 너무 크거나 무거운 책은 안 된다. 여러 권을 가져갈 수도 없다. 한 권을 선택하기 위해 다른 모든 책들을 포기해야 한다. 고민이 되고말고. 아주 즐거운 고민이다. 짐을 싸다 말고 책을 넣을 만큼의 공간만 남아 있는 가방의 지퍼를 열어둔 채 이 책을 꺼냈다 놓고, 저 책을 들었다 놓고. 책장(선반)을 뒤적뒤적, 책장(페이지)을 훌훌, 정신을 차려 보면 무릎 앞에 책이 잔뜩 쌓여 있다. 이런, 이런. 또 시작이군.


이 시간이 즐겁다. 짐을 싸는 시간. 야반도주가 목적이 아닌 바에야, 여행을 위한 짐을 챙기는데 즐겁지 않을 리가 있나. 신이 나서 하다 보면 어느새 잠잘 시간이 훌쩍 지나 있곤 한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려던 계획은 늘 실패다. 아주 기분 좋게.


어쩌면 짐을 싸는 시간이 여행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인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이 시간이 좋아 여행을 사랑하는지도.


심혈을 기울여 고른 책을 넣고 가방의 지퍼를 채운다. 연락처가 있는 이름표가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하면 준비완료.

여행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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