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20년을 살다가도 한국에 몇 주만 다녀오면 이상하게도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공항에서부터 집으로 가는 길부터 뭔가 어둡다. 한국만큼 가로등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우선 가로등 색깔도 흰색이 아니라 오렌지 색깔이라 그런지...
그리고 가장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어두침침한 집들과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조명의 색.
살다 보면 분위기도 있고 이쁘기는 한데 가끔은 좀 한국처럼 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한국에서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면 더더욱 뭔가 답답한 기분이 든다. 아니면 환해야 하는 공간은 좀 하얀색으로 환하게, 분위기가 어두워도 되는 공간은 분위기 있게 하는 것도 좋겠는데 영국에서는 하얀 불빛(여기에서는Cool White light라고 한다)을 집 안에서 거의 볼 수가 없다.
영국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있기는 한데 여름은 선풍기나 에어컨 없이 지낼만하고 겨울에는 영국 겨울이 가장 추울 때=한국 겨울의 평균 온도보다+5도가 높다고 생각하면 된다. 대신 눈 대신 비가 온다. 그리고 여름 서너 달은 8시간만 어둡고 16시간이 해가 떠 있다면 나머지 달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반대로 16시간이 어둡고 8시간만이 밝아진다. 그래서 더욱더 조명은 중요한 것 같다.
영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느낌은 거실이나 화장실, 복도는 백열등을 사용해도 분위기 있고 괜찮았는데 공부방이나 서재까지 노란 오렌지 색은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데스크 램프라도 하얀색 불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그 당시 home base(집 안, 정원을 꾸미거나 전구 조명 등을 파는 가게)를 찾아갔다. 샘플로 장식된 데스크 램프들의 색도 다들 오렌지 색에 노란 은은한 빛뿐이었고 아무리 찾아도 흰색 전등을 찾을 수가 없기에 직원을 불러 방 불빛을 하얀색(한국 같은 형광등을 따로 설명할 단어도 몰랐다)으로 바꾸고 싶은데 없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아니면 공부를 할 때 쓰는 데스크 램프라도 하얀색이 없냐고.
점원이 도저히 이해를 못 하는 눈치기에 난 순간 그 매장 천장 아주 높은 곳에 있는 형광등을 가리키며 저런 하얀색을 살 수 없냐고 설명을 했다. 하지만 직원은 어리둥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저런 불은 일반 가정집용으로는 없다는 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딱히 본인도 잘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난 급기아 이렇게 물었다.
"넌 학생 때 책상에 앉아서 어떤 데스크 램프를 썼어?"
그러자 직원이 말했다.
"난 항상 다이닝 테이블에서만 숙제를 하고 공부를 했어."
(아이들 말로는 친구들 방에 큰 티브이와 화장대, 멋진 옷장이나 큰 베드는 있어도 책상 없는 친구들은 꽤 많다고 한다. 정말로 영국 아이들은 다이닝 테이블에서 숙제를 많이 한다. 그래도 중 고등학생이 되면 자기 방에서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하는 책상과 조명은 가장 중요한데... 한국은 공부하는 학생방에 침대는 없어도 책상은 꼭 필요한데 여기에서는 다른 건 다 없어도 방 안에 침대와 거실 안에 소파가 없는 건 상상이 안 간다.)
그리고 울 동네에 이케아가 들어오기 전까지 그날부터 몇 년간 난 내가 원하는 색은 못 구했다...
시간이 지나고야 알게 되었지만, 은은한 빛을 내는 오렌지 노란색을 영어로는Warm White Light라고 하고 내가 그토록 원했던 흰색 빛은 Cool White Light라고 한다.
요즈음은 아마존이나 이케아에 가면 LED Cool White Bulb라고 하면 살 수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영국 가정에서 Cool White를 사용하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물론 우리 집은 이제 내 소원대로 아이들 공부방과 밥을 먹는 다이닝 룸은 Cool White Light로 거실, 복도, 키친과 다른 방들은 은은한 Warm White Light를 쓰고 있다.
근데 정말 맹세컨대 10년 전만 해도 일반 매장에서는 Cool White Light는 거의 잘 팔지도 않았다.
(요즘 주변 한인들한테 이런 얘기를 하면 잘 안 믿는다..)
영국에서 한 참 지낼 때에는 이 은은한 불빛이 더 편하고 좋다가도 매년 여름 한국에 한 달 남짓 다녀오면 이상하게도 칙칙하고 어두운 기분이 든다. 한국만큼 가로등도 환하지 않고 가정에서는 형광등을 거의 쓰지 않고 백열등을 쓰니 확실히 나라 전체가 어두침침하고 조금은 답답한 기분이 있다.
20년을 살아도 항상 드는 기분…
반대로 영국에서 있다가 한국을 가면 너무 밝아서 정신이 없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항상 뭔가 열심히 움직이고 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공항에 내려서 공항버스를 타고 대구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려 마중 나온 가족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면 가는 길이 항상 저녁 시간이었는데 온갖 네온사인들과 번쩍번쩍한 가게들 조명을 보면 얼마나 어색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지 그 느낌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 영국에 와서 어둡고 침침하다는 생각은 하루 이틀을 지나면 다시 익숙해진다. 사실 계속 있으면 오렌지 빛을 띤 백열등은 확실히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고 은은하게 공간을 밝혀줘서 로맨틱한 분위기와 여유로운 마음을 주는 것 같다.
뭔가 와인 한잔과 촛불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랄까…
여름 몇 달을 제외하고는 오후가 되면 어둑어둑해지니 영국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왠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이제 적응을 많이 한 듯.
이젠 한국도 예전에는 가정집에서도 거의 형광등만을 많이 썼는데 요즈음은 서재나 미디어룸 베란다 현관 같은 곳에서는 백열등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나의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런 벽난로 딸린 어두침침 분위기 좋은 영국 단독 주택을 그대로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딱 가져다 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도 다이닝 테이블에 앉아서 구석에 있는 간접 조명 Warm White Light와촛불을 켜 두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