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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 1/느려 터진 토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느려 터진 나라 영국에 대해 투덜대기

by ziniO

기다림의 미학 1/ 느려 터진 토끼



20년간 영국에서 살아오면서 꽤나 빠른 걸 좋아하고 급한 성격이었던 나는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


요즘은 나 자신이 기특해질 정도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나처럼 영국에 오래 산다면 다 똑같아질 듯.

처음에는 영국의 모든 부분이 느려 터져 답답해 죽을 것만 같던 나도 어느 순간 그냥 화가 많이 나는 상태에서 안달- 짜증- 초초함- 그리고 포기와 해탈의 경지까지 이르다 보면 이제 한국의 빠릿빠릿함이 어색해지기도 한다.




요즘은 여기도 그나마 IKEA 같은 대형 DIY 매장이 들어와서 좀 나아졌지만 내가 첨 유학을 왔던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영국 외곽이나 시골에서 침대를 주문하면 걸리는데 몇 개월은 보통이었다. 가게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걸 보고 주문을 하면 몇 주 내지 몇 개월이 걸리는 건 보통이었다. 그때 학교에 다니면서 영어 선생님께 가구 주문을 했는데 너무 느리다고 투덜거렸더니 선생님이 자긴 바닥에서 6개월째 주무시고 계신다고 하셨던 기억이.

그래서 농담이지만 침대를 주문하면 그때부터 원산지에 가서 나무를 잘라서 만들어 오늘 줄 알았다...

거기다가 서비스 마인드는 어떻게 된 것이 엉망이었다.

지금도 있지만 예전에는 ARGOS라는 백과사전만 한 큰 잡지책에서 물건을 많이 주문했었다. 그냥 먹는 거 빼고 모든 걸 살 수 있는 주문 책이었다. IKEA가 영국 곳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고스에서 정말 많은 주문을 했었다. 집에서 쓰는 주방용품부터 정원 가꾸는 물품, 그리고 침대와 소파, 텔레비전과 냉장고까지 없는 게 없었으니까.

작고 간단한 건 동네마다 있는 아고스 매장에 가서 주문을 하고 물건을 받으면 되었지만 가구나 침대 같은 큰 물건은 주문을 하면 배달을 해 준다. 그때 걸리는 시간은 보통 2주에서 3주. 나쁘지 않았다.

한 번은 아고스에서 장식장을 주문했다.

주문한 건 다이닝 룸에 놓을 장식장이었는데 돈을 좀 더 주고 DIY(많은 가구들은 플랫 상태에서 오면 집에서 조립을 한다)가 아닌 다 만들어진 완성품을 주문했는데 아랫부분인 서랍장 위에 윗부분 장식장을 얹어놓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위아래 두 부분이 두 상자로 배달이 되어야 했다. 2주가 좀 넘어 물건이 도착했다. 아주 들뜬 마음에 오픈을 해 보니 두 박스다 아래쪽 서랍장이었다. 너무나 황당해서 배달해 준 아저씨 전화번호가 있어서 전화해 보니 자기랑 상관없다고 본사로 전화를 해 보라고 하셨다.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본사로 전화를 해서 따졌더니 아직도 이 말이 생생하다.


" It's not my fault. I will contact the manufacturer."

(난 이때부터 영국인들의 변명, "내 책임이 아니다"는 말을 무지 싫어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책임은 아닐지라도 본인들이 그 회사에서 일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그 회사에 대한 소속감 내지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마인드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말을 한 이상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니 꼭 해야 할 때 미안하다는 말을 참 안 하는 거 같다.)


그리고 빨리 제대로 배달을 해 달라고 했더니 collecting 아저씨를 보낼 테니 2주 정도가 걸린단다. 난 그냥 장식장 윗 쪽을 들고 와서 배달해 주고 동시에 잘못 배달된 아래쪽을 가져다면 되잖아했더니 매뉴얼이 그렇지 않다는 말뿐. 반송 처리를 하고 다시 배달해 줘야 한다고 했다. 이 융통성 없는 시스템.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따져도 방법이 없으니 기다렸다.


그래서 2주 후에 아저씨가 와서 가져가고 또 2주 후에 새로운 물건이 도착.

그런데 정말 환장할 일이 벌어졌다.

이번엔 똑같은 윗 쪽 장식장만 두 박스가 왔다.

이 즈음되면 이 시스템은 바보인가 싶기도 하고 너무너무 화가 났지만 콜 센터 쪽은 또 자기네들 잘못이 아니랜다.

똑같은 반복으로 또 2주를 기다려 아저씨가 와서 가져가고 또 2주 후에 물건이 와서 드디어 바로 된 위쪽과 아래쪽 장식장 두 박스를 배달받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장식장은 처음 주문부터 꼬박 서너 달이 걸렸다.

시간이 걸린 것도 화가 났지만 이 상황에서 아고스로부터도 아님 그 누구로부터도 사과를 받지 못한 부분이 너무 화가 났다. 누구의 책임이라는 것인가.


그래서 난 편지를 썼다.

그냥 무작정 책에 있는 아고스 본사 앞으로.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와 그 책임감에 대해 그럼 이 상황에서 아고스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이며, 이 장식장을 복도에 수개월을 두면서 어린애들을 키우고 있는 집에서 애들이 지나가다 머리를 부딪히고 불편했던 시간들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이냐고. 아무도 잘못이 없다고 하는데 이 시간 동안 내 돈을 지불하고 긴 시간 동안 잘못된 배달로 물건을 사용하지 못했던 나의 스트레스는 누구의 잘못이냐고.. 말도 안 되는 문법 다 틀리는 영어로 된 손편지를 A4용지에 가득 두 장은 보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지금보다는 확실히 삶에 열정이 있었던 때라....

어쨌든 몇 주 후에 아고스로부터 사과 편지가 왔고 거기에 30파운드 아고스 쿠폰이 들어 있었다.

'배상을 받자고 쓴 편지는 아니었고 큰 회사로써 좀 더 좋은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와 질을 높이는 회사가 되라는 차원? 에서 쓴 글이었는데... '


혼자 주절거리며 그 공짜 쿠폰과 함께 난 아고스에 대한 미움도 사라졌다.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해져 나의 얄팍한 자존감은 따위 고작 30파운드로 무너졌다...


어쨌든 이런 일들 속에 20년을 살다 보니 나도 이제는 아주 많이 느긋해졌고 이런 일엔 이제 화도 안 난다.


요즘은 그나마 아마존 덕분에 정말 신세계가 열린 것 같다. 프라임 회원이 되면 다음날이나 다 다음날에 물건을 받을 수 있으니 정말 신세계가 맞다.

이런 세상이 오다니.. 싶기도 한데 모든 물건을 아마존에서 주문할 수는 없으니 로컬 매장에서 아니면 인터넷에서 주문을 해야 하는 물건은 그래도 2주나 3주는 걸리지만 그냥 감사하게 생각을 한다.





느려 터진 영국.

한 번은 6월 말에 배관공 아저씨한테 정원에 수도꼭지를 하나 설치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아저씨는 이제 여름 시즌이 다가오니 7월과 8월엔 본인의 휴가 기간이라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여름에 정원에 물도 줘야 하고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는데 빨리 해 달라고 딱히 닦달은 못 하겠고.

같은 동네에 사는 아저씨라 서로 수시로 동네 공원에서 산책을 하면서 마주치는데 "하이~~" 하고 인사를 하신다.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로는 '한 시간만 울 집에 오셔서 수도꼭지 좀 달아주세요…!!! 뭐 딱히 바쁘시지도 않으신 것 같은데...'

그만큼 돈에 매여 쫓아가지 않고 본인의 여가 활동과 여유를 정말 잘 즐기는 영국인의 모습이 참 부럽고 맞다 싶으면서도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손님 입장이 되면 정말 답답하다......ㅠㅠ


요즘은 이 시골 마을에서도 지난 몇 년간 유럽인들이 꽤나 많이 이주를 했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한 건 이해가지만 그래도 난 유러피안들이 좋다. 차를 수리하러 갈 때도 그리고 보일러나 배관일도 이젠 유러피안들에게 부탁을 하면 꽤나 빨리 일처리를 해 준다. 꼭 남의 나라에서 일하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나라에 따라 국민성? 이란 것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




한국은 모든 게 빠르지만 여기와 가장 비교되는 것 중 하나.

한국의 시스템 중 가장 놀라운 시스템은 바로 은행이다.

예약을 따로 잡지 않아도 되고 계좌를 열기 위해 은행을 방문하면 그 자리에서 카드를 만들어 주는 멋진 나라이다. 거기다 인터넷 뱅킹을 하고 싶다 하면 직원이 몇 장의 종이에 체크를 해 주고 난 거기에 동의 사인만 하면 끝이다.


영국은......

음...

우선 카드를 쉽게 안 만들어 준다. 직업이 없으면 남편이 아무리 제대로 된 직업이 있어도 와이프는 안 만들어 주는 은행도 많다.

어쨌든 내가 자격이 있다고 치자.

그럼 원하는 은행에 우선 전화를 해서 은행계좌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 빠르면 1주 늦으면 수 주? 안에 예약을 잡아 준다. 그 시간에 가면 담당자가 나오고 20~30분 정도 질문과 답변?을 하며 아주 다양한 서류들이 오간다. 무사히 통과를 해도 카드를 당장 받을 줄 알면 오산이다. 집에 가서 기다리면 된다. 일주일 후 즈음 집으로 카드가 도착한다. 엄청 기쁘다. 그런데 카드 사용은 못한다. 왜냐하면 비밀번호가 없으니까.

그리고 며칠 후 비밀번호가 적힌 편지가 도착한다. 예전에는 복권 긁듯 동전으로 긁으면 되었는데 요즈음은 어떤 은행은 스티커를 벗기면 희미한 네 자리 숫자가 나온다.

그리고 인터넷 뱅킹을 하고 싶다고 등록을 했으면 그 또한 편지를 기다리면 된다.

어쨌든 은행 카드를 만들어 사용하기까지.

한국은 30분 내외 그 자리에서 카드를 받고 당장 사용할 수 있다면,

영국은 예약부터 빨라도 2~3주, 한 달은 걸린다고 보면 된다.



한국은 영국에 비해 너무너무 빠르다.

배달은 다음 날에.. 아니 어떤 건 아침에 주문하면 그날 저녁에 도착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빨리빨리가 다 좋은 건 아니다.

거기에 배달하는 분의 과로사나 급하게 가다가 난 사고 뉴스를 접할 때면 또 이건 아닌데 싶다.

빨리 배달 와서 소비자는 좋지만 모든 일엔 과부하가 일어나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니.



[토끼와 거북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정말 이번 코로나 사태로 느끼는 것인데 꼭 빨라야 하는 일처리는 확실히 토끼처럼 빠르다.


그래서 느린 토끼라는 제목으로 시작을 해 보았다.

예전에 그렇게 빨리빨리를 좋아하던 나 또한 이제 느려 터진 토끼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 느려 터짐이 또 장점이 될 때가 많다.


다음 화에서 다루겠지만 여유로움의 미학에서 오는 장점은 또 아주 많다.

여유롭고 느리게 살다 보면 뭐 그다지 빨리 달리지 않아도 잘 살 수가 있고 모든 게 또 거기에 맞추어져서 잘도 돌아간다. 삶의 질 또한 높아지는 것 같다.



토끼가 느릿느릿할 때는 빨리 달리지 못해서 느릿느릿한 게 아닐 것이다. 언제든 빨리 달려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고 또 달려 나갈 수 있다는
자신만만함도 있을 것이다.



그래 이렇게 믿어야지.

아니야 이렇게 믿어야만 이 땅에서 잘 살아갈 수가 있어.


오늘도 난 세뇌 아닌 뇌를 나 자신에게 시키며 오늘 하루도 감사하기로 한다.


Argos에서 4개월 만에 온 가구. 지금도 다이닝 룸에 추억의 가구로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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