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만 8세와 만 5세에 한국어를 익히기 위한 한국행을 결정했고 1년을 계획했던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쩌다 보니 2년간의 한국학교 그리고 또 2년간의 국제학교를 거쳐서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버렸다. 이제는이제 더 이상 한국에서 지내게 되면 영국 학교 적응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 모든 걸 다 접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의 4년은 정말 많은 일들과 변화들이 많았는데 내가 살던 동네로 돌아와 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한국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이웃집의 자동차도 그대로였고 앞집 옆집 꽃나무도 잔디밭도 주변 동네 분위기도 그대로였다. 한국과 영국에서의 시간은 꼭 다르게만 흐르고 있었다는 기분까지 들게 했다.
달라진 건 우리 아이들의 키와 동네 아이들의 키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기 같았던 아이들은 4년이란 시간 동안 키도 생각도 훌쩍 커 버렸다.
영국에 돌아오고 나니 아이들은 만 11세와 만 8세가 되었다. 영국에서 큰 아이는 이제 중학생 나이가 되었고 작은 아이는 영국 초등학교 5학년 나이가 되었다. 갑자기 부쩍 큰 아이들에 비해 엄마가 같이 잘따라가고 적응하지 못할 정도로 아이들은 생각도 키도 많이 자랐고 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아이들과 나란히 옆자리.. 아니 이제 그 뒤를 따라가기에도 벅찼다.
남자아이였던 큰 아이는 크게 반항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시간이 흘러서 내가 망각을 한 것이고 분명 아이의 행동과 말 한마디에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던 기억들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사한 건 아이가 어릴 때 한국말을 잘할 줄 모르니 사춘기가 되면 엄마의 잔소리에 못 알아듣는 영어로 중얼거리며 문을 쾅 닫을 거라 걱정했던 일은 없었다. 언어소통의 어려움으로 그토록 걱정했던 일은 다행히 없었다. 집에서는 나의 바램대로 적어도 엄마와는 한국말로 대화를 하였고 (어차피 서로 영어를 쓰는 것 자체가 어색해졌다) 그리고 서로 반 농담으로 대꾸도 해 봤자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하게 되니 한국말로는 내가 어쨌든 절대 지지 않으니 엄마의 권위 아닌 권위? 가 세워졌다. 아~~ 주 흐뭇하다.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그렇듯 시내가 아닌 조용한 주택가는 분위기가 다 비슷할 것이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던 동네가 꽤 시골이라 반항을 한다고 해도 집을 나가서 자동차가 없이는 딱히 갈 곳도 없을뿐더러 시내를 간다고 해도 오후 5시가 되면 거의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아버리고 아이들끼리 놀 수 있는 곳은 딱히 없다. 화가 나서 집을 나가도(딱히 나간 적은 없지만) 집들과 잔디밭 뿐, 춥고 비도 추적추적 와서 10분도 채 안 되어 들어오게 될 거니 그 부분은 아주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가슴이 아팠던 큰 애의 사춘기 시절 반항은, 엄마가 부르면 딱히 말은 안 해도 왜 부르느냐는 식으로 엄마를 쳐다보는 귀찮아하는 그 눈 빛, 그리고 방 문을 두드린 뒤 잠시 얘기하자고 문을 열고 무슨 말을 하려 하면.. 한숨부터 쉬고 “ 왜, 엄마.. 무슨 일인데?” 하던 그 눈빛에 방문을 닫고 가슴이 좌악.. 심장이 쪼여들 듯 아파오던 순간들이었다.
어릴 때 내 팔 베개를 하고 책을 읽어주면 "엄마 사랑해" 하면서 "난 엄마랑 평생 살 거야"라고 했던 그 사랑스럽고 귀여운 유년기의 아이가 사라지는 것 같아 얼마나 슬프던지.
그때마다 나 또한 아이와 함께 성숙해져야 했다.
정말 버릇이 없이 이유도 없이 짜증 냈던 날은 기다려 줬고, 그러다 보면 본인도 엄마한테 버릇없이 잘 못 한 걸 알기에 시간이 지나면 슬슬 농담을 하며 다가오려는 순간들이 생긴다. 그러면 그때는 아침에 화가 났던 나의 모든 감정을 아이에게 다시 풀지 말고, 아주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길면 잔소리이다)
"너 알지?"
딱 한마디만.
그러면 아이가 좀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게 되고 그때는 그냥 따지지 말고 너무 혼내지도 말고
"앞으로는 그러지 마. 그리고 잘할 거야."
정도로만 마무리해 주었다.
내가 항상 스스로 기억했던 말..
자식 때문에 맘이 아플 때마다
"그래, 난 이모. 딱 이모 같은 존재만 되자" 라는 다짐을 했었다.
이모 같은 존재가 되면 엄마로서의 자식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드니 더 잘 이해하고 자식에도 큰 선을 넘지 않으며 친절하게 대하고 칭찬을 많이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느 날 나에게 말을 해 주었다.
“엄마 나 지난 5년간 학교를 몇 번을 옮긴 줄 알아?
“몇 번인데?”
"5번째야. "
영국초등학교-한국초등학교- 국제학교- 영국에 돌아와서 들어가고자 했던 학교에 자리가 없어서 웨이팅 리스트 넣어두고 집 근처 세컨더리 학교에 3개월- 그리고 영국 그래머 스쿨.
“그래 그러고 보니 맞네. “
“그래서 많이 힘들었지?”
“아니야.. 엄마가 3개월 있었던 학교에 얼마 안 있을 거라고 교장선생님께서 주신 남이 입던 아주 큰 교복 입게 하고 제대로 안 사줘서 힘들었지만 나름 재미있었어."
하고 농담으로 넘긴다.
어느덧 자라서 의젓하게 얘기해 주는 아이가 너무 대견하다. 한국말 하나 못 하는데 하루 종일 한국말로 공부를 해야 하는 학교에 엄마가 한국에 가자마자 집어넣어 버리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기 와서도 영국에서 친했던 초등학교 친구는 다 자라서 어색해져 버리고 또 새로운 학교에서 새롭게 적응했어야 하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