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던 후배가 있었다. 직속 사수와 부사수로 만난 후 인원이 도무지 충원되지 않아 꼬박 칠 년을 거진 둘이서만 일했지만, 서로가 그것을 내심 감사히 여길 만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잘 맞던 친구였다. 저 녀석도 혹시 나처럼 실은 인간처럼 보이는 도마뱀이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던 만큼 나와 생각도 행동도 비슷했기에 나는 그의 존재를 내심 감사히 여겼던 것도 같다.
그러잖아도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을 녀석이었겠지만, 공동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빠르고 단단하게 결속력을 다졌다. 본부장은 우리 부서에 관심이 없는 이였고, 실장은 업무관계보다는 인간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이였으며, 팀장은 그저 윗선에 잘 보이기만 바라 '예스맨'이 되어 일을 잔뜩 받아와가지고서는 팀원들에게 대충 던져두기 좋아하는 이였으니 우리들의 결집이 강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우리 팀의 일도 아닌 일을 어영부영 떠맡아 어떻게든 처리하고 났는데, 실장이 생각하던 방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둘이 함께 팀장 앞에 불려가 한 시간을 깨지고 온 날.
우리에게 업무 방향을 지시한 것은 팀장이었다. 심지어는 회의롤 통해 결정한 것도 아니고 팀장 혼자서 정하여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를 한 것이었다. 우리가 꼬박 2주를 야근해가며 만들어 낸 결과물을 보고 흡족해하던 팀장을 떠올리면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나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었기에 우리는 익숙하게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깐 채 한껏 송구스러운 표정을 만들며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는 수없이 욕설을 뇌까리더라도.
자리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오전 업무 시간을 고스란히 날린 것을 확인하고 나는 그만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리지 못했다. 꼬박 사십 년을 묵었으면서도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눈물을 쏟아버릴 것 같아 큼큼, 괜스레 목을 가다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던 물컵에 먼지가 동동 떠다니는 것이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 먼지와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물 속에 둥실둥실 떠다니며 누군가에게 거슬리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내 처지와 비슷해보여 그를 동정하기로 했다.
목구멍 너머로 불쌍한 나 자신을 삼켜 넘긴 후 무심코 휴대폰을 보니 아내에게서 연락이 와 있다.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집어든 휴대폰 화면은 사랑하는 나의 딸 슬아와 아들 승호의 환히 웃는 얼굴이다. 나를 닮아 양 볼에 보조개가 쑥 패인 두 아이들의 뽀얗고 동그란 얼굴이 수정체를 지나 망막에 맺힌다. 문득 이 부당한 삶을 견디는 것이 그럭저럭 할 만한 것으로 느껴진다.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내에게 답장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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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요, 선배님. 업, 업보, 뭐 이런 말이 좋아요. 그거면 내가 편해질 핑계를 만들 수 있거든요. 누가 아무리 나를 괴롭게 해도, 나를 막 함부로, 막 그래도요, 속으로 '저 사람 저 행동, 저 말은 전부 부메랑처럼 업보로 돌아올 거다' 생각하면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후배도 나만큼 속이 상했을 것이라 생각해 위로하기 위해 불러낸 그날 저녁의 술자리에서, 나는 의외의 말을 들었다. 후배는 억울함을 당하는 그 순간은 물론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했다. 선선히 배실배실 웃는 그 얼굴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 기분이 묘했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느냐고 묻지 않았지만 후배는 마치 내 질문을 들었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선배님, 나는...... 나는 나쁜 사람이기 싫어요. 다른 사람에게 말고, 나 자신이 나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게 싫어요.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러는 게 힘이 들어요. 괴로워요. 그런데 그냥, 저 사람도 언젠간 다- 돌려받을 거다, 생각하면, 그러면 편해요. 심지어 가끔은 그 사람을 안쓰럽게 봐줄 수도 있어요.
안쓰럽게?
저 사람 저거 돌아오면 다 감당하기 정말 힘들 텐데, 감당을 할 수는 있으려나, 하고 생각하면 측은지심이 들거든요.
.......
알아요, 정신승리인 거. 근데 그러면 안 돼요? 그렇게 생각하고 치워 버리면, 나도 편하고 저 자식도 마음껏 지랄할 수 있고, 그러면 아무도 피해 보는 사람이 없는데, 정신승리 좀 하면 안 돼요?
후배가 비실비실 웃었다. 술에 취한 웃음인데 왜인지 모를 부러움이 가슴 한 켠을 불쑥 찌른다.
저는 그냥..., 그러고 싶어요. 누구를 싫어하는 데에 힘 쓰지 않고, 그렇다고 누가 괴롭히는 나를 그냥 그 자리에 괴롭힘 당하게 내버려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기분 풀릴 때까지 복수하는 데에 내 인생을 쓰지도 않고...... 그렇게요.
옳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왜인지 옳다 말해주기 어려운 말이다. 후배가 말한 그것이 하고 싶다고 되는 일이었으면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부러움의 정체를 깨닫는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명확히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저 이가 부럽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스스로를 인지하고 응원하는 저 이의 삶이 부럽다. 질투하지만 질투하지 않겠다. 나는 질투하는 나보다는 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고, 방금 정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후배는 고개를 폭 떨구며 킬킬킬 소리를 내어 웃었다. 후배가 팔꿈치를 세워 든 술잔에 내가 든 술잔을 부딪치고 곧바로 입에 쏟아 부었다. 달달한 소주가 혓바닥을 지나 목구멍을 쓸고 위장에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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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해, 정말이지 가슴 시리게 춥던 2월의 어느 목요일, 후배는 출근하지 못했다. 삼십칠 세에 맞은 심장마비였다. 그 애는 결혼한 지 일 년 반 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 애의 아내는 임신 육 개월 차였다.
후배의 장례식장에서 그 애의 아내는 소리없이 조용히 눈을 부릅뜨고 울었다. 검은 한복을 입어 배가 부른 티가 전혀 나지 않는 그녀를 나는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을 듯해 입을 다물었다. 후배가 떠나는 자리를 배웅하는 그 곳에는 소리없는 울음과 닳은 노모의 찢어질 듯한 곡소리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장례식장의 직원들이 바쁜 손길로 차려내어 놓은 떡이며 반찬들에 손도 대지 못한 채 몸을 일으켜 나오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처자식을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까? 그래도 자다 갔으니 편히 갔다며 '정신승리' 하고 있을까?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 갔으니 아무래도 좋다 싶지는 않을까?
나는 그 애가 닮고 싶었다. 나보다 몇 살은 어린 녀석이었지만, 후배였지만, 그래도 내가 갖지 못한 많은 것들을 가진 이였다. 나는 그 녀석이 부러웠다. 이따금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 애를, 닮고 싶었다.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 녀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문득문득 궁금했다. 고통 속에 너를 세워두고 싶지 않고 싶다던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영원히 궁금할 테지만 영원히 답이 없을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