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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Jun 22. 2024

이장, 살아남은 자들의 마지막 축제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이 모였구나,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모든 건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되었다. 제희야. 너 다음주 수요일 목요일 시간 비워라. 어머니의 말씀에 내가 순간적으로 뭘 잘못했지? 하는 질문과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많은 악업들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를 말하려는 찰나 어머니의 말이 나의 생각을 끊었다. 아버지 이장하러 갈 거니까 그래. 그러니까 맨날 신던 크록스 신지 말고 검은 옷과 정장으로 맞춰 와. 그렇구나. 그 말에 나는 급격하게 평온해졌다. 사실 간간이 아버지의 묘가 이제 만기일이 다 되었다는 이야기를 친가집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계신 묘지에서는 20년이 지나면 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묫자리를 옮기는 과정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어머니의 전화를 듣고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건 영화 <파묘> 정도였다.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떠올린 건 지루한 서류 작업들에 약간의 오컬트를 끼얹은, 그 무엇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글은 몇 번 쓴 적이 있지만 굳이 다시 쓴다면, 아버지는 만 세 살에 돌아가셨고 그 이후로 내 인생에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에게도 몇 번 아버지에 대해 물어봤지만 어머니는 이제 하도 오래 전 일이라 그런 사람이 살아있던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아버지란 이런 삶에다 우리를 내팽개치고 혼자 돌아가신 그런 존재였고, 우리는 삶을 허덕이면서 사느라 아버지를 금세 잊어야 했다. 아버지는 죽었지만 다음 날 일어나서 밥을 먹어야 했고, 밥을 먹으려면 일을 해야 했으므로. 그렇게 앞만 앞만 보고 달리다 벌써 세월이 서른 셋이 흘렀다. 나는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


이장은 아침부터 밤까지 해야 했고, 일정은 빠르게 시작되었으므로 우리는 그 전날 아버지 묘가 있는 성남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평상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음날 덥겠다. 옷을 왜 그런 걸 입고 왔어. 평범한 대화가 오가고 우리는 식사를 맛있게 했고 잠을 잘 잤다. 그 디음 날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채. 아침이 되자마자 우리는 산소로 향했다. 산소로 향하는 동안 어머니는 근처 카페를 찾았다. 내가 찾냐고 물으니 파묘를 하는 시간에 앉아있을 곳을 찾는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우리가 카페를 가는 일은 없었다.


산소에 도착하니 익숙한 묘지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먼저 안내사무소를 찾았다. 내 몸무게만큼 두꺼운 서류가 산소 행정직원에게 전해지자, 그 사람은 뚱한 목소리로 인부들이 미리 가 있다고 하셨다. 과연 아버지 산소가 있는 자리로 가니 인부 세 분이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바보같게도 내가 맨 처음 물은 건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라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인부 중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먼저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과일도 술도 준비하지 않았고 그 과정은 수목원으로 이장한 후 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엉겹결에 절만 몇 번 하고 말았다.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보니 인부 중 하나가 그랬다. 그럼요. 나이드신 분들은 뼈를 잡고 우시기도 합니다.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시작합니다. 곡괭이의 깡 소리와 함께 맨 첫번째로 부서진 건 나와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진 묘비였다. 더운 날이었다. 엄마와 동생은 물을 사온다고 잠시 나갔다. 나는 지켜보았다. 인부들은 가장자리의 화강암을 갈랐다. 몹시 더웠다. 벌레들이 자꾸만 나에게 엉겨붙었다. 그렇지만 왠지 모습을 봐두고 싶어서 나는 서서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와 동생이 돌아왔다. 인부들은 쉬지 않고 흙을 퍼다 날랐다. 우리는 그 분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늘로 갔다. 어머니는 기도를 시작하셨다. 살아있는 자가 대책없이 죽은 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만 했다. 어머니는 잠시 우셨다. 저 멀리서 깡깡 돌을 부수는 쇳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렌즈가 자꾸 돌아가 눈물이 났다. 헤아릴래야 헤아리기 힘든 감정이었다. 어머니는 차 안으로 들어가 쉬셨다. 기도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오세요. 한 시간 약간 안되고 나서 인부 중 한 사람이 우리 가족을 불렀다. 우리는 갔다. 아버지의 묘가 열려 있었다. 동생은 어머니가 보지 못하게 할세라 먼저 갔다. 인부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운이 나쁘면 고인이 모두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그러면 살점이 남는다고 말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하얀 백골이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내가 기억이 아닌 실제로 보는 처음 보는 아버지였다. 사고사셨나봐요. 아버지를 정리하시던 인부가 말했다. 네. 교통사고였어요. 하지만 뇌수술을 하셨어요. 어머니가 대답했다. 인부 중 한 분이 관 속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뼈를 수습했다. 나는 그 과정이 그렇게 적나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관은 좁았다. 더웠다. 아버지를 덮었던 명정이 술과 함께 미처 삭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살아있는 세월보다 여기 누워있는 시간이 더 길었구나.


아버지는 사과박스 하나에 담겼다. 동생은 그걸 들고 뒷자석에 앉았다. 이제 이 분골을 화장해서 유골함으로 만들어 수목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좌석에 앉았다. 아버지 생전에 운전 하실 줄 알았어요? 내 질문에 어머니는 아니라고 말하고 뜸을 들인 후 말씀하셨다.


이제야 우리 가족이 다 모였구나.


그리고 우리들은 말이 없었다. 각자의 삶에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서 촘촘히 박힌 상처들을 헤아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우리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아픔이자 개인의 서사에서 또 다르게 적힐 이야기들이기도 했다. 말없이 화장터로 향했다. 화장터에 아버지를 1층에 내려놓고 또 서류 작업을 하러 갔다. 그 때 동생이 그랬다. 아버지 한 번 들고 와 봐. 그 말에 내가 가서 아버지를 들어봤는데 묵직했다. 사람의 하나가 들어간 뼈의 무게보다 더.


화장은 한 시 반에 진행된다고 했다. 우리는 2층에 있는 곳에서 라면과 설렁탕을 먹었다. 화장이 시작되니 오라고 해서 내려갔다. 곡소리는 나지 않았다. 우리 가족 셋이 단촐하게 화장터에 서서 아버지의 뼈를 담은 상자가 불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화장까지는 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유족에게 배분된 쉼터에 앉아 있었다. 가족들은 지쳐있었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서 꺼내어진 아버지는 뼈를 가는 소리와 함께 예쁜 천에 담겨서 나왔다.


동생은 아버지를 들고 나왔다. 우리가 갈 수목원은 경기 남부에서 경기 북부를 가로질러야 갈 수 있었다. 아버지를 담은 그릇은 손이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아버지가 따뜻할 아는구나. 아버지도 언젠간 따뜻했었겠구나. 나는 그 때 화장실로 들어가 엉엉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동물적으로 울었다. 아버지 보고 계시나요. 당신의 새끼가 이렇게 울고 있어요. 나는 이제까지 회피했던 삼십 년간의 눈물을 다 뽑아낼 듯 울었다.


나는 그 날 많은 것을 배웠다. 이장의 모든 과정은 오컬트도 서류작업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는 내가 세 살 때 있었던 것이므로 너무 어렸다. 우리에겐 한 번의 기회가 더 필요했다. 아버지를 보내고 아버지를 정리하고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들이.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를 잊고 달려온 시간들을 갈무리하고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


우리에겐 애도가 너무 부족했고

눈물이 너무 부족했으며

갈무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후 아버지는 우리 인생에 그 날 하루 잠깐 지났다 사라졌어도 아버지의 뜨거웠던 뼈를 담았던 그릇이 앉았던 차 뒷자석에는 동그랗게 고무 눌은 자국이 남게 되었다. 나는 그 자리를 보면서 내 마음속에도 아버지에 대한 그런 자리를, 고무가 눌어붙은 것 같이 고통스러우나 그 고통을 응당 소중하게 안고 갈 수 있는 자리를 한 켠 마련해두기로 했다. 어떤 고통은 아버지의 존재만큼이나 가치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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