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인 학원에 등록할 용기를 가졌을 때 내 나이는 52세. 한번도 관심 가져보지 않은 분야였다. 3개월 속성 코스에 점심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다니며 열심을 내었던 종로길.
사업 하다가 망했다.
모든 걸 정리하고 마음 추스릴 시간도 없이 직장이라는 공간에 떨어뜨려진 건 내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왜냐면 한 집에 시어머니와 나, 두 여자의 그림자는 갈등이라는 배낭을 메고 살아가는 모양새여서 껄끄러울 수밖에 없고 집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늘 얼굴 맞대고 있는 것은 아니지 싶어서다. 시어머니께서 집안일을 도와주셨기에 나가서 일할 수 있다는 감사함은 있지만 가정형편으로도 맞벌이는 해야 했다.
긴장된 직장 분위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지시를 받아야 하는데 그 ‘지시’라는 단어가 감정 상태에 따라 가끔 힘들게 다가왔다. 조직적으로 굴러 가야 하는 당연한 이유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나였다. 한마디로 정신 에너지가 고갈되어 문제가 생긴 거지. 내가 누구에게 지시를 받고 움직여야 한다는 상황이 그렇게 적성에 안 맞는지 몰랐다. 사업이 부도 나고 며칠이라도 마음을 관리했더라면 괜찮았을까? 청년 때부터 지시를 하는 위치에 있었고 결혼하고도 사업으로 누구의 지시를 받아보지 않았던 내 안의 것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해왔기에 더 힘들었을 수도 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람을 인정해야 채워지는 기쁨도 누릴 수 있을 텐데.
그 일로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하던 직장을 퇴사한 뒤 무엇이든 일을 해야만 하는 집안 형편이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가게를 얻어 보기로 하고 현금 장사가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며칠을 고민하고 고민했다.
직장을 그만두니 시간을 내가 선택할 수 있어서 오히려 마음이 평안했다. 자금이 부족한 탓에 시설비가 많이 들지 않고 노동력이 들어가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퇴사한 직장에서 옷을 만지고 기계도 다루어본 경험이 있어 옷수선 가게를 해보기로 했다.
종로 패션디자인 학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든 배우려고 열심을 다했다. 평소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을 보게 된 나는 그들의 열정에 감동을 받았고 도전도 받아 열심 또 열심히 배웠다. 일단 옷에 대한 무지에서는 벗어났지만 헌옷을 수선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정신까지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학원에서 실감했다. 차라리 새옷 만드는 것이 더 쉽다 할 정도라니.
이 어려운 작업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을 가득 품고 배우니 이수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무튼 속성 3개월 과정을 마치고 두려움과 비장한 마음으로 실습을 하기 위해 수선가게가 많은 이대 앞으로 무작정 갔다.
그 일대를 여러 번 돌며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다, 용기를 내어 한 수선집 문을 열고 들어가 학원에서 3개월 배웠으며 실습을 위해 왔노라 말했더니 여사장이 한번에 오케이 한다. 마침 사람을 구하려는 중이었다며 월급을 80만 원 주겠단다. 실습을 하려면 오히려 실습비를 내고 배우는 사람도 있는데 월급을 주겠다니 감사하기도 했지만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수선집에 취직을 한 셈이 됐다. 정말 "야호!!"는 이럴 때 사용하는 거 아닐까?
신이 나서 아침 일찍 나가 문을 열고 청소를 하며 하루 일과를 준비하고 열심히 배웠다. 이대 앞에는 상권이 좋아 가계 임대료가 엄청나다는 걸 알기에 수선으로 비싼 월세를 내고 운영을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정도였지만 그 많은 수선집들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또 새로운 것은 한 점포에 여러 명의 기술자들이 일하고 있는데 자신이 일한 만큼 수입을 가져간다는 거다. 점포 주인이 장소와 모든 소모품들을 제공하고 기술자들과 6:4로 나눈다.
내가 실습한 곳은 부부만 일했는데 어릴 때부터 그 직종에서 일한 사장은 기술이 좋았지만 남편이라는 사람은 도박에 빠져 있었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어서 부부가 한 공간에서 일하면서도 요상한 분위기에, 함께 있는 사람까지 민망했다.
결국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가게를 접는 바람에 나는 다른 집으로 가야 했다. 한 업종의 기술자들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수입에 따라 오늘은 이곳에 몇 달, 저곳에서 몇 달, 옮겨 다니며 일하다보니 비밀이 유지되기 어렵다. 같은 고통을 받는 부인들이 열심히 사는데, 남자들은 딴 세상에 사는 것 같아서 부인들이 참 고달프게 사는구나 싶어 오히려 내가 한숨이 나왔다. 자식들 때문에 이혼도 못 한다고 신세 한탄을 하면서도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모습은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년 동안 실습을 하고 목동에 수선집을 운영하게 된 나는 어떻게 되겠지 하며 겁 없이 일을 저질렀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 막막했다. 목동 로데오거리에는 옷가게들이 많아 젊은이들로 거리는 넘쳤지만 홍보도 해야 하고 수선 기술도 아직은 부족한데 도저히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라 기술자를 구하려 여기저기 부탁을 했다. 다행히 실습했던 수선집 사장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주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이미 다른 수선집과 거래하고 있는 옷가게를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걱정해 주는 분들도 있었기에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물론 결정은 옷가게 매니저들이 하는 거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래하던 수선집이 오백 원이라도 비싸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나는 옷가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홍보한 결과 열 군데를 거래하게 되어 부지런히 거래처를 오갔다. ‘역시 나는 홍보하는 일에 일가견이 있는 건가?’
우리 두 사람은 열심히 일했다. 수선하는 일은 조심스럽기는 해도 집중해야 하는 일이라서 잡념이 사라지는 좋은 점도 있다. 매니저들 기분을 헤아리는 것도 일상이어서 늘 가슴 졸이며 일하다보니 스트레스가 쌓였다.
헌옷 수선은 먼지도 많이 나고 고개를 수그려야 하는 작업이라 5년째부터는 목이 고달파 병원에 갔더니 목디스크 조심하라며 수선일을 그만두란다.
남의 지갑을 여는 일도 쉽지 않은데 병까지 얻으면 어찌 하나. 세상 살아가기 참 힘들다. 이러면 이래서, 저러면 저래서 안 되니, 어찌 살면 잘 사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