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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Oct 21. 2021

언제나 짝사랑

 

세상은 달라져 시어머니와 며느리 갈등이 아니라 장모와 사위 갈등이 점점 노출된다고 한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 했는데 사위도 자식이라는 말에 기대어 자식처럼 대하고 싶지만, 자식은 아니어서 말 한마디도 어떻게 받아들일지 언제나 신경이 쓰인다는 사람들이 많다.

서로 의지적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면 어른인 장모가 더 많은 애씀이 필요하다.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이 가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참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어떻든 간섭하지 않는 게 부모로서 현명한 선택인 것 같다.


“김치 맛있네?”

“민이랑 정아랑 영심이 조금씩 줘야지.”

“당신은 음식 만들어 퍼주는 게 취미야.”

“딸내미들이랑 동생인데 뭐.”

“그저 자식들 생각뿐이군.”

“엄마가 자식 생각하는 거 당연하잖아.”

“김치는 지들이 담가 먹을 수 있어야지.”

“걔네도 하려고 맘먹으면 잘해.”

“당신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잘 먹고살아.”

“그렇긴 해. 맛있는 게 널려 있는데 내가 만들어준 반찬이 마냥 좋지 않을 수도 있어.”


이런 대화를 하고 나면 괜히 자식들 준다고 애써서 만든 음식들이 갑자기 초라해 보인다.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길 수도 있어서 괜한 수고를 한 건 아닌가 생각도 많아지고. 남편의 이런 질투 어린 투정도 내가 힘들까 봐 미리 막을 치고 있음을 알기에 눈치를 보게 되지만, 큰애는 남아공에 5년이나 살다 와서 자주 해줄 기회도 없었다. 


근데도 한 번씩 해주려면 남편이 없을 때 후다닥 끝내 버린다. 제철에 나오는 채소로 밑반찬을 만들 때도 자식들 입에 들어가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즐겁게 만들게 된다. 모든 엄마들의 공통된 마음일 건데, 세상 돌아가는 거 보니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다.


조미료 맛에 길들이지 않으려고 될 수 있으면 사 먹는 음식은 안 먹이고 키웠는데 이제는 내 관리 밖으로 날아가 버렸으니 어디서 어떤 걸 쪼아 먹을지. 그저 잘 판단하고 살펴서 먹는 지혜가 있기를 바라본다. 요즘 며느리들은 시어머니가 아들 생각해서 싸준 음식들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데 그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장면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도 겪은 일이라며 며느리나 딸이 요청하지 않으면 절대로 해줄 필요가 없다고, 침 튀기며 열나게 말한다. 하지만 그 말속에는 서운함과 야속함이 서려 있다. 근데 해 주고 싶은 걸 어찌 하나. 맛있는 거 보면 먼저 생각나는 걸 어쩌나. 어미들의 짝사랑을 자식들은 알까 몰라. 쓸데없는 관심이라고 핀잔을 안 하면 다행이지.  


하얀 백지에 가정교육이라는 기본 바탕색을 입혀야 하는데 가문마다 그 색이 다르겠지. 한걸음 걸을 때마다 타인을 만나게 되고 바탕 위에는 그림이 하나씩 추가된다. 또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갈 때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는 자신의 생각과 삶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내게는 성격도, 좋아하는 음식도, 생각도 다른 두 딸이 있다. 일밖에 모르는 엄마 아빠와 놀이공원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정직하고, 예쁘게 커주어서 늘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가정 안에서 그림을 채워 가고 있어, 예쁜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대해본다.


결혼을 했으니 내 자식이 아니라 사위의 아내고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다. 어떤 녀석들이 우리 식구가 되려나 궁금해하던 지나온 시간들. 다행히 두 사위 다 정이 많고 심성이 곱다. 딸만 있는 집에 아들같이 와주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맘에 거스르는 말과 행동이 왜 없겠는가마는 이젠 내 자식이잖아 라고 못 들은 체 못 본 체 넘어간다. 사위들도 내가 하는 말이 다 이해되어서 웃어넘기는 건 아닐 테니까.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른데 어쩌겠어? 때로는 사위가 손자 손녀에게 하는 말과 행동이 못마땅하지만 잊자. 제 자식인데 뭐. 간섭이 지나치면 안 한 것만 못한 결과가 될 수도 있어. 그리고 요즘 사회 이슈로 등장하는 장모 사위 갈등의 통계 수치에 올려지겠지. 내 입장만 말하는 건 아니다. 사위들도 할 말은 있으니까. 속상하면 내가 지구를 떠나면 돼.


젊은 사람들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노인들에게는 지혜가 있으니 지혜는 살아온 날들의 경험이 만들어낸 자국이다. 그렇기에 사회는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행복해질 것 같다. 이제는 자식들 걱정 떨쳐버리고 나를 먼저 생각할 때가 되었나 보다. 남편과 나 두 사람의 건강과 경제 그리고 정신적 안정을 위해. 


가끔은 사돈댁에 가족이 된 딸들이 시어머니와 갈등이 없는지 궁금해도 물어보지 않는다. 잘하고 있을 거라 믿기 때문에. 잘하는 게 어떤 기준인지는 가문마다 다르지만 요즘 말로 신세대라고 말대답 꼬박꼬박 해대지는 않은지. 그들도 듣고 배운 것이 있으니 지혜롭게 잘해 내기를 바라본다.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직장인으로 숨쉬기도 벅찬 일상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손자 손녀가 보고 싶기도 하고, 쫓아가 집안일을 해주고 싶어도 조금만 많이 움직이면 피로감을 느끼는 요즘이다. 아가들이 저렇게 커가니 내가 안 늙고 배겨. 


부모들의 짝사랑은 허공에 날아가는 시대. 관심은 갖되 간섭은 노.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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