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 Oct 22. 2021

작은 극장에서 우리는



붉은 카펫이 우아한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소극장은 지하에 있었지만 맘에 들었고 관람실 내부는 아담한 게 내 집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극장을 만드는 과정이 힘들었을 텐데 남편은 혼자 뛰어다니며 까다로운 소방시설까지 모두 완벽하게 준비해놓고 나에게 공개를 했다. 얼마나 기대하며 뛰었을까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느끼는 순간이었다. 공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도 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원했기 때문에.     

남편과 방학동이라는 낯선 곳에 소극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망원동에서 방학동으로 출근하려면 지하철에 버스에 마을버스까지 여러 번 환승하며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아담하고 깔끔한 극장이 매력이 있었는지 관람객이 많았다. 그리고 극장을 운영하려는 사람들이 우리 극장을 모델로 삼았고 여러 팀들이 오고 갔다. 하루하루 즐겁게 생활하느라 먼 거리도 멀지 않게 느낄 정도였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다 보니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한 부모가 되고 말았지만.


큰딸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선걸음에 밥을 먹고 독서실로 갔었는지,

 “그 집 딸은 학교 끝나고 집에 들어가선 금방 가방 메고 나와” 

어쩌다 만나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하는 말이다. 

둘째는 엄마가 없는 집에 오기 싫다고 투정을 부려서 미안한 마음에 새 한 쌍을 사주었다.

“엄마. 새는 학교에서 돌아와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네가 말을 걸어봐. 물도 주고 모이도 주면서.”

“나는 새보다 강아지가 좋아.”

“강아지는 아무 데나 똥 싸고 오줌 싸는데?”

“그래도 학교 갔다 오면 현관에서 나를 반겨주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딸들에게 미안한 맘이 가득했지만 함께 계셨던 시어머니는 아이들이 원하는 엄마의 정을 채워 줄 수 없었나 보다. 다행히도 반듯하게 자라주어 얼마나 대견하고 감사한지. 그렇게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매일 돈 들어오는 재미로 힘든 줄 모르고 일했는데 몇 년 후에 IMF가 왔다. 불안한 경제로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많았고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은 극장에서 시간을 보낼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사람들의 주머니에 삼천 원이 없었다.


극장 운영은 점점 어려워지고 버티다가 직원들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금요일 마지막 상영을 끝내고 포스터와 풀통을 들었다. 그 시간이 밤 9~10시. 우리는 골목골목을 다니며 포스터를 붙였다. 일주일마다 바뀌는 영화이기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풀통을 들고나가야 했다. 금요일이 아니어도 집에 오면 11시경인데 그날은 더 늦은 시간에 들어왔고, 그제야 우리 집은 사람 사는 것처럼 환하게 불을 켜고 간식도 먹고 씻느라 분주했다.


장 보는 일도 방학동에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 48킬로의 작은 몸이 무거운 배추를 들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부끄러운지 몰랐으니. 그래서 아줌마는 용감하다는 말이 생겼나 보다. 그 과정에 스트레스가 쌓였던지 가슴 두근거림과 불안함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저렇게 나에게 왔던 시간들은 녹초가 되었고 정신 에너지는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땅만 보고 그저 그냥 걷기만 했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아이들에게 무슨 생각을 하며 공부를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밥을 주고 학교를 보낸다고 부모 역할을 다 하는 건 아닌데라는 죄스럽고 미안했던 마음이 많았다. 아이들은 성장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렸어도 모를 거다, 우리가 아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말한들 고리타분한 넋두리로 들리겠지. 그런 삶을 모르니까. 


1년 365일 하루도 쉬는 날 없는 영화관. 힘들다고 한숨만 쉬고 있기에는 현실에서 목을 죄는 일이 터졌다. 도둑이 들었단다. 청소 아저씨의 전화를 받고 달려가 보니 엉망이었다. 도둑맞으면 잃어버린 물건보다 무서움이 더 크다는 말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경찰에 신고를 했어도, 피해 액수를 조사해 가도 중간 보고도 없이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리나라 경찰이 무능하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당장 잃어버린 기계를 준비해야만 영업을 할 수 있기에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를 하며 준비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싫었다. 


12년 동안 세 번이나 도둑을 맞고 나니 거친 바람 속에 버려져 있는 듯했다. '조금만 참아내면 괜찮아질 거야.'로 그렇게 힘들게 버티다 남편은 다시 직장에 들어가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남편도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영화 상영 도중에 스크린이 꺼져버리는 일이 가끔 일어나 가슴이 쿵쿵 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아질 거라는 극장 운영은 희망이 보이지 않고 나는 점점 외로웠다. 그렇게 어리석은 몇 년을 또 기다리다 소망의 끈을 놓기로 결단을 했다. 12년이라는 시간이 오래된 건 아니지만 어려움 속에서 희망 하나로 버티던 우리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건물주는 원상 복구를 요구했고 알아보니 그것도 많은 돈이 또 필요했다 건물주와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울고 말았다. 돈이 없어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싫었지만, 부도를 내야 하는 처지를 이야기하는데 주책없이 눈물은 왜 멈추지 않고 흐르는지. 며칠 후 그냥 비워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고 너무 감사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 많았던 사업을 접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고 감사하게도 극장을 접은 다음날 취직이 되어 하루도 집에 머물지 않았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오히려 생활이 나아졌다.


“당신은 꿈은 뭐였어?”

“내 꿈은 돈 버는 거야”

“돈 버는 게 꿈이라니, 그런 꿈도 있어?”

“응. 예전에도 지금도 그게 꿈이야.”

“꿈이 그렇더라도 당신은 사업이 안 맞는 거 같아.”

“그런 가봐.”


꿈을 이루고 싶어 사업을 해도 누구나 돈을 버는 것은 아니며 돈을 벌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잠 설치면서 이 악물어도 꿈은 그냥 꿈이었나? 꿈은 이루어진다는데.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상이 있는 것 같다. 육신의 힘듦보다 마음의 고통이 사람을 더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반복하는 게 인간이다. 남편과 나는 지나간 일들은 잊고 선한 마음을 오늘이라는 바구니에 담아 늘 감사함을 잊지 않기로, 새로운 삶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걸고 복사해서 수시로 꺼내보기로 다짐했다.     


남편은 꿈이 돈 버는 거여서 젊었을 때 주식투자를 하며 관련된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었나 보다. 몇 년은 주식투자만으로 생활했으니 공부한 보람은 있었다 해도, 남편은 그 유혹을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접지 못하고 겨우 건진 보증금으로 주식투자를 해보고 싶다며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마지막 선택을 해보겠다는데, 그 보증금이 연기처럼 사라질 거라는 당연한 결과를 알았던 나는 마음을 접고 허락을 했다. 


허락한 이유가 있다. 만약 극장 원상복구를 했었다면 없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뜻을 머리로 안다고 무조건 반대하기보다 마음으로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보증금은 사라지고 손을 털었다. 결국 그것까지 없어지니 알 수 없는 자유가 나를 지배한다. 몸속 세포까지 안정을 찾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아! 이런 게 다시 시작한다는 거구나” 

남편이 너무나 힘들게 만든 극장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았으며 어찌하든지 조금만 버티면 회복될 거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결과는 많이 아팠다. 그리고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빨리 결단하는 건강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꿈이든 돈이든 좇는다고 다 잡히는 건 아니었다. 







이전 12화 너나 잘해, 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