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을 남편 손에 쥐여주고 축복 기도 한다는 핑계로 안아 준다. 그 나이에 민망하게시리 아침마다 무슨 일이냐고 하겠지만 서로를 포옹하는 일조차 없는 건조한 시간들에 대한 배려라고 해도 될까? 나는 그렇게 작은 활력을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 매일 안으려고 달려드는 나를 밀어내지 않고 남편도 은근히 좋아 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정희야 잘했어” 가끔 나를 손으로 다독이며 칭찬해준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기분 좋은 표현들을 하면서 살고 싶다.
여자들만 근무하는 곳에서 일하다보니 서로의 일상을 주고받는 일 중에 남편 흉을 보거나 자식 자랑 비중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동료들은 “어머~ 부럽다” “어머 어머!” 남의 부부 포옹에 자기들이 좋아한다. 재미대가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선자언니 남편은 “어이어이 저리가!” “어허 왜 이래?”라고 한단다.
“우리 집 인간은 이래.”라며 씩씩대는 선자언니의 모습이 더 재미있어서 한바탕 웃었다.
“댕겨 오세요.”
아침에 현관에서 출근하는 남편 마스크 바르게 고쳐주고 쭉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은 손으로 비벼 진정시킨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잰 걸음으로 베란다로 나가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차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또 배웅하고, 그냥 그대로 서서 가을을 보았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바라보았더라면 그림이 더 좋았겠다고 잠시 떠올렸지만 가로수 잎이 빨갛게 물들어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에만 집중하는 것도 가을에 대한 예의라 여기며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다.
11월 초라서인지 하늘은 더 할 나위 없이 맑다. 당장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유혹이 일었지만 ‘아직은 아니야 가을볕이 충만해지는 오후 1시경이 좋아.’ ‘햇빛으로 받을 수 있는 비타민D는 공짜잖아? 얼마나 좋아.’하며 조금 참았다.
코로나 때문에 남편 직장에서는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하는 통에 아침마다 내가 분주해졌다. 오늘 반찬은 장조림, 꽈리고추볶음, 명란젓, 김치. 후식으로 샐러드 위에 삶은 계란을 예쁘게 잘라 키위와 함께 올렸다. 요것조것 색깔과 영양을 고려한 식단을 짜느라 매일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지만 재미도 굿이다. 아이들 학교 다닐 때 싸주던 실력을 25년 만에 다시 써먹으려니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건강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됐지 뭐.
설거지를 대충 끝내고 밥 두 숟가락에 장조림과 상추 다섯 장을 손으로 찢어 넣으니 양푼에 한가득이다. 쓱쓱 비비려다가 ‘오늘은 참기름 넣자.’ 선심이라도 쓰듯 참기름 한 방울 또르르. 식탁에서 먹을까 잠시 머뭇거리다 무시하고 소파에 깊숙이 앉는다. 언제까지나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양푼을 다리사이에 끼우고 한 술 입에 넣기 전에 텔레비전을 켠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보살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에 집중하며 밥을 먹다가 “웃기고 있어.” 하며 채널을 획 돌린다. “역시 다큐나 여행 프로가 최고야. 언제나 옳은 선택이었든." 리모컨을 올리고 내리고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여행 프로가 눈길을 잡는다.
몇 해 전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왔었다. 북쪽 단에서부터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그때 인상깊었던 곳은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숨었다는 엔게디 동굴이었다. 깎아지른 절벽에 커다란 구멍들이 많았는데 그 속에 다윗이 숨었다고? 많은 세월에 지형이 바뀌긴 했겠지만 저 절벽으로 어떻게 올라갔을까. 와~ 감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엔게디 광야 주변에는 사해가 있어 설레는 맘으로 수영복도 준비했었는데 시간에 쫓겨 사해에 들어가 몸이 뜨는 경험을 하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쉬움이 크다.
사해란 물을 받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아 높은 염분으로 생명체가 살 수 없다. 그래서 죽은 바다라 불리기도 하지만 마사다를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본 사해의 하늘 빛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엔게디 메마른 땅 여기저기 샘들이 솟아나 물줄기를 따라 만들어진 폭포를 보니 신기하기만 했다. 사막에 폭포라니, 그래서인지 그 광야에는 사슴들이 많다고 한다. 다시 여행하고 싶은 이스라엘.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사해에 들어가리라.
가을이 저렇게 손짓을 하는데 나가야지. 하루에 6~8km 걸으려 노력하지만 나이가 더 들면 그 거리도 힘들어 지려나? 운동은 나이에 맞게 하라는데 그래도 조금은 욕심내도 괜찮겠지. 날마다 달라지는 공원 풍경을 보면서 빨갛고 노랗게 물들다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주워 책갈피 속에 끼워놓았다. 어릴 때 추억을 담고 보니 기분이 좋다. 낙엽은 봄을 기약하는 설렘이 있어서일까? 떨어져도 슬프지가 않다.
마스크 속 입술은 의식적으로 스마일 하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평가하다 보면 제자리로 돌아와 있곤 한다.
남자와 여자가 운동을 하는데 남자가 양산을 쓰고 간다.
‘저 남자 뭐야?’
‘이 남자는 걸음걸이를 보니 쬐~끔 젊은 사람이군.‘
‘앞에서 열심히 걷는 저 엉덩이. 짝궁뎅이네. 크크.’
‘이 여자는 운동 나온 거 맞아? 웬 옷 자랑이야.’
‘저 여자는 바지를 너무 치켜 입어서 여자 망신 다 시키고.’
‘강아지 참 예쁘게 생겼다~ 아는 척해도 될까나?’
‘저 사람들은 이 길을 전세 냈어?’
모른 척하고 툭 치고 지나갈까 하다가 “지나갈게요~” 했더니 획 돌아보는데 못마땅한 표정이다. '보긴 뭘 봐 지나가겠다는 내가 잘못한 거야?'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걸어야 한다.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왼쪽으로 걸어온다.
‘저 여자는 오른쪽도 모르나?’
‘교육을 더 받아야 해.’
일제에 의해 시행되었던, 차들은 오른쪽 길 사람들은 왼쪽 길. 어릴 때 이 노래를 얼마나 많이 불렀던가. 오랫동안 써 왔던 습관들이 몸에 기억되었나 보다. 그래 습관을 고치기가 쉽지 않지 내가 이해해야지. 이해한다고 하면서 그냥 걸었다. 누가 이기나 보자는 어깃장이 발동한다. 만약 맞닥트리면 난 할 말이 있어. “오른쪽 보행입니다”라고 목소리를 탁 깔고 단호하게 말하리라. 근데 1m까지 다다랐는데 상대방이 쓱 피해버린다. 잘못하고 있노라고 알려주려 했더니 재미없게 됐군.
‘웃기고 있어. 너나 잘해. 누가 누굴 가르친다고.’
'네가 뭔데 지나가는 사람들을 평가해, 왜?'
끝없이 움직이는 생각. 운동하는 사람들 표정을 보면 아무 생각도 없는 듯한데 나만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는 걸까? 하긴 나도 겉보기에는 아무에게 관심 없는 듯 보이겠지?
사람들마다 생각이 깊고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이다.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지혜롭다는 것을 나는 왜 젊어서는 못 느꼈을까. 가끔 표현을 하지 않는 남편 속마음을 떠보려고 덜떨어진 여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깊은 내면을 발견하고 속으로 놀라 자빠지고 싶다. 자랑스럽기도 하고 '어느 자리에서든 무시당하지는 않겠구나.'라는 안도? 남편은 욱하는 감정만 잘 다스리면 좋을 텐데.
남에게 무시 안 당하려고 의식하는 일이란 정말 피곤한 거다. 사는 게 뭔지 이제는 남 의식하지 않고도 잘 살아지는 나이가 되었지?
별별 생각을 다하며 걷다보니 1시간이 훌쩍 넘었다. 다리가 아프다고 울상이다. 매일 걷는 거 쉽지 않다. 아이고 다리 무거워. 일단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집까지는 천천히 걸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