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절망에도 바닥이 있을까?
아버지와 막내오빠를 먼저 보내게 되었죠. 벌써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가슴이 아릿해질 때가 있어요. 평탄하고 순한 인생길이 펼쳐지길 원했던 인간적인 희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었다고, 그래서 내성이 생길 만큼은 생겼다고 자신했었지만, 두 분의 죽음은 저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들었고 끝없이 추락해가는 자신을 망연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저 절망에도 바닥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죠.
그들을 사랑했지만, 이해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었다는 복잡한 감정, 오빠의 마지막 전화를 받았더라면! 그래서 다정한 인사라도 주고받았다면! 그랬다면 그는 떠나지 않았을까?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그렇다면 그도, 나도,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까?... 다른 인생은, 또 무엇을 말하는 걸까?
자신이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사실보다, 항상 저보다 먼저 와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인생의 허무가 더 무서웠습니다. 이 고통에 의미가 있다면, 내가 겪어야 하는 시련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견디기가 나을텐데.
알 수 있는 것은 ..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캄캄한 가운데 무언가를 붙들어야 살 수 있다는 본능이 작용하더군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저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새벽이면 가슴을 쥐어뜯는 통증을 느끼며 잠을 못 이루곤 했지만 병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육친을 여의었을 때 애도기간은 육 개월 정도 소요된다는 이론적인 설명과 불면으로 많이 힘들면 약을 처방해 줄테니 적당히 복용하라는. 그 말을 할 때 늙은 의사의 눈빛은 천진하고 고요했습니다.
어떤 이는, 신은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분명 있다고 말합니다.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요. 절박한 상황 속에 놓여 있었던 저에게는 신이 있어야만 했어요. 설사 인간의 상상력으로 가공된 존재일지라도 저는 그 당시 절대자의 이름을 불러야만 했어요.
사람이 외로운 건, 자신의 속사정을 누구에게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고, 설사 털어놓는다 하더라도 온전히 서로를 수용해줄 수 있는 관계는 없다는 현실에서 비롯되더군요. 사람은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받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신이 있어서 나보다 나를 잘 아시고 온전히 사랑으로 나를 지으시고 세상 마치는 날에 그 분 곁에서 영원히 안식할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은 어떤 심리이론이나 인문학이 줄 수 없는, 깊은 위로를 주더군요.
신은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분일까요?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겁니다. 벌레가, 자신보다 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하더라도 그 존재에 대해 온전히 아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인간이 절대자에 대해 설명하는 것 또한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아버지라 혹은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지?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지?... 모두 인간적인 고뇌일 뿐,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니까요.
오늘도 저는, 사막을 홀로 걸으며 자신의 신을 찾았던 이들처럼, 제 인생의 광야를 가로지르며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아버지께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