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 아이
제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친구를 만날 때 약속장소를 서점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신촌 OO서점에서 몇 시에 보자, 하는 식으로요. 그러면 먼저 도착한 사람은 서점 안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렸죠. 그랬었던 한 시절이 저물었네요. 요즘은 시내에 오프라인 책방도 보기 힘들고 만남의 장소를 굳이 서점으로 정하는 경우도 드물어졌어요.
대학 때 동기 중 한 남학생이 학교 앞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더군요. 모두 과외를 해서 돈을 버는 시절에 그 아이는 수업을 마치면 신촌 굴다리 앞에 있는, 지금은 사라진 서점에서 일을 한다 했어요. 그 아이가 꿈꾸던 세상이, 그가 지키려던 자기다움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외형으로 제게 보여지는 그 아이의 자기다움은 어렴풋하게 있었거든요. 과묵한 아이였고 행동으로 자기 삶을 만들어가려는 어떤 단단한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저도 그런 모습으로 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노동하고 글쓰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이상을 버리지 않고.
그런데... 그 시절의 저는 중요한 질문들 다 묻어두고 살기만! 했거든요. 물론 그런 선택을 했던 자신을 지금에 와서 책망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해서라도 젊음을 견뎌냈고 사막 같았던 그 시기를 건너올 수 있었으니 대견하다 해야겠죠.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저는 그때보다 많은 나이에 도달해 있고, 지금 서점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책냄새가 곳곳에 스며들어 하루하루 낡아가고 있는 서점의 문을 열고, 책을 나르고... .
어떤 세상을 꿈꾸는 걸까요?
아들러의 심리학 중에 '허구적 최종목적론'이라는 이론이 있어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은 사실 현실에서 구현될 가능성이 희박해요. 그러니 이상이라 하는거구요. 그런데 허구에 불과한 그 이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니 중요하다 할 수 있어요. 인생이라는 거대한 광야의 시간을 어느 별을 바라보며 걸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차원의 문제잖아요. 아파트 평수나 자동차 사양을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인데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거나 회피하려 하죠.
가끔 생각하게 되어요. 우리는 각자 우리 자신의 무엇을 밟고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많아요. 건강, 돈, 외모를 가꾸는 일, 직업... 이 모든 것들이 중요하지만 어떤 조건 속에서도 버리지 않아야 할 소중한 것들이 있어요. 개인마다 조금씩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무엇이 우리 자신을 사람이게 하는가? 하는 것과 관계된 문제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하는 차원의 가치들.
그 때 학교 앞 서점에서 책 먼지 속에서 일을 하던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아저씨가 되어 있을까요? 그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을 비추어보던 또 한 아이는 지금... 이렇게 서점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직 무더운 기운이 남아 있는 가운데 어디선가 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먼 기억을 실어옵니다. 지나온 인생의 모든 계절이 우리를 마침내, 깊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