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늦은 오후 손님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였어요.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손님 한 분이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오시더군요. 카운터로 곧장 오시며 색칠하는 책을 찾는다, 라고 말을 건네오셨어요. 컬러링북이 진열된 매대로 안내해 드렸죠.
컬러링하실 분이 어떤 분이신가요?
저희 어머니세요. 병원에 계십니다.
그럼 색칠을 좀 해보셨나요?
네. 색연필로 꽤 하셨어요.
그렇다면 도안이 좀 복잡해도 될 것 같네요. 이런 꽃 그림은 어떨까요!
저는 컬러링북을 몇 권 손님 앞에 놓아드리며 카운터로 돌아왔어요. 시간이 좀 경과되고 손님은 책을 두 권을 들고 다시 제게로 와서 묻더군요.
혹시, 그림만 있는 책이 있을까요? 어머니께서 병원에서 심심하실 때 보실 수 있는... .
저희 서점에는 그림만 있는 책을 드물구요. 대부분 그림책이 글밥도 함께 있어요.
저는 비교적 글밥이 적은 그림책과 그림만 나오는 이수지 작가님의 책도 보여드렸어요. 손님이 몇 권의 책을 살피시다가 선택하시지는 않고 컬러링북만 들고 계산대로 오시더군요.
제가 조금 망설이다가 말씀을 드렸어요.
손님, 저희 어머니께서는 평생을 글을 모르신 채 사시다가 삼 년 전 돌아가셨어요. 만약 손님의 모친께서도 같은 경우라면 가끔 손님이 병원에 계신 어머님을 방문하실 때 함께 그림책을 펼치고 글을 읽어주셔도 특별한 추억이 될거예요.
그 남자 손님이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으시며, 그렇겠네요!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는 다시 그림책 코너로 가셔서 책을 살펴보시다 제가 추천해드린 김동성 작가님의 <엄마 마중>을 선택해서 카운터로 오셨어요.
저희 모친도 사실, 글을 모르셔요.
계산을 하시며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드리며 모친과 좋은 시간을 보내시라고 말씀을 건넸어요. 책을 읽어드리게 되면 더 글밥이 많은 책을 원하실 수도 있다는 말과 함께요.
서점문에 달아놓은 작은종이 딸랑!하고 울린 후 손님은 떠나시고 저는 잠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잠겨들었습니다. 자기 살기 바빴던 딸은 어머니께서 글을 모르신 채 평생을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죠. 어머니께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신 후에야 그 삶이 얼마나 한탄스러웠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니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가 부모님과 보내는 시간은 사실 '긴 이별'의 시간들이고 우리 자신이 나이들어 갈수록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게 되죠. 그리고 그 사실을 확연히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때인거죠. 마냥 계실 줄 착각했던 부모님도 차례로 떠나니게 되자 평소에 그분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두지 않았음을 후회하게 됩니다. 이제 부모님은 펼쳐볼 기회가 없는 책이 되어 버린거죠.
서점 유리창 너머 도로 위를 질주하는 차들을 바라보며 어머니 보내드린 날을 떠올렸네요. 고운 삼베수의를 입으시고 평생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화장을 하셨던, 다시 볼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 사람이 죽은 후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우치게 했던 어머니의 마지막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너무 애쓸 일도 아니고 집착할 것도 사실은 없는 게 인생인 것을... 젊었던 시절의 저는 몰랐었네요. 세상 어딘가에 진귀한 것들이 있을거라 여기며 낯선 곳을 헤매다녔던 딸은,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이르러 부모님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값진 보물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돌이킬 수 없고 한 번 뿐이었기에 너무나 소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