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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림 Jun 05. 2021

차 우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차 보관법

아무리 귀한 차도 잘못 보관하면 썩은 낙엽일 뿐

동양차를 열심히 사먹게 된 건 꽤 근년의 일이지만, 나는 늘 커피를 못마시기 때문에 차를 마셔야 하는 계통의 사람이었다. 내 안의 한국인도 씁쓸이 좋아하는데, 체질적 문제인지 스무 살 때조차 위장이 받아주질 않아서... 직장생활 경험이 누적되며 커피와의 트러블은 더욱더 심각해졌다. 그리고 5~6년 전 어느 날,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 잔 마셨다가 인간의 존엄을 잃을 정도로 장에 탈이 나 응급실로 실려간 이후 완전히 커피를 끊고 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이 담배도 안 피우는데 커피조차 못마신다는 건, 간편하고 싼 잠깐의 기분전환 카드를 하나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허브티든, 카멜리아 시넨시스든, 늘 대용품이 있어야만 했다.


늘 차가 필요하지만 주머니가 가벼웠다보니 티백도 사지만, 잎차를 함께 구매하곤 했다. 십수 년 전의 티백은 늘 품질 대비 단가가 비쌌기 때문이다. 심지어 요즘 같은 모슬린 티백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이라 늘 종이 맛이 나는 티백을 마시곤 했다. 하지만 잎차를 틴 상태로 그대로 두고 먹다 보면, 한국의 습도와 일교차를 견디는 좁은 집의 눅눅한 부엌에서는 맛이 꽤 빨리 변질되었다. 잘못 보관되어 변질된 차는 아무리 고급품이라도 썩은 낙엽일 뿐이다. 그래서 100g당 만 원짜리 트와이닝스 레이디 그레이를 오래 두고 끝까지 마시기 위한 방법을, 3g당 만 원짜리 차를(물론 이걸 일상적으로 마시는 건 아니지만) 사게 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한국인의 부엌은 차 보관에 친화적이지 않다

통상적으로 한국 사람이 차를 보관하게 되는 곳은 보통 부엌 찬장이나 싱크대 밑의 서랍 같은 곳이다. 왜냐면 집이 좁은데 싱크대 위 전기포트나 연결된 가스렌지에서 물을 끓이고, 부엌의 식탁에서 차를 마시게 되기 때문이다. 부엌에 의자가 딸린 식탁이 있는 것도 사실 20~30대의 도시민 평균적으로는 굉장히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대부분 거실과 부엌이 통합되어 있는 곳에 늘 펼쳐진 좌식 테이블이 있거나, 아예 원룸이면 세워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테이블을 펴는 환경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일반 식재료 및 못다한 설겆이 그리고 음식물쓰레기가 보관되는 어드메 근처에 차통을 보관하게 되고... 출퇴근이나 학업을 하면서 집은 늘 비워져 있고... 그런 식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 도시민의 공동 주거환경은 뭔가를 보관하기가 꽤 가혹하다. 그게 식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몇 년 전 기회가 되어 꿈에 그리던 원목 가구를 집에 놓게 되었는데, 다다음 해 여름이 되자 가구들이 뒤틀리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연교차 및 습도차를 견디지 못하여 가운데가 쩍 갈라지게 된 것이다. 가구점에 의뢰해 수리 및 코팅 작업을 해서 그 뒤로는 괜찮아지긴 했지만, 한국 도시민은 튼튼한 원목 가구도 갈라지는 꽤 가혹한 주거 환경에 놓여있다는 걸 그 때 깨닫게 되었다.


보통의 한국인이 차 깡통을 끝까지 마실 수 있는 방법은 차광밀봉소분 뿐이다

통상적으로 알려진 차 보관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롱차, 홍차 - 빛이나 공기가 통하지 않는 서늘한 장소에 밀봉보관

녹차(특히 중국산) - 빛이나 공기가 통하지 않는 냉장 온도 밀봉보관

보이차, 백차 - 빛이 통하지 않으며 공기가 서늘하고 습도가 높지 않은 곳에 통풍 가능한 형태로 보관

차는 주변의 냄새를 빨아들이는 속성을 갖고 있고, 빛과 공기를 차단하지 않으면 산화가 빠르게 일어나기도 한다. 적당히 50,100g씩 밀폐된 병이나 틴에 담고 떠서 먹는, 그런 적당한 방법으로는 차의 변질을 막을 수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 이전에는 잎차를 집에서 매일 마신다는 자체가 정말 드문 일이었다. 일이 너무 많거나 몸이 아프면 몇 개월씩 차 마시기를 쉬어야 할 때도 있었다. 따라서 티백이 아닌 잎차 봉다리나 깡통을 샀다면, 집안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형태로 철저히 밀봉소분하는 정책을 약 10년간 유지하고 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상미기한에서 한 3~4개월 지나도 그럭저럭 괜찮게 마실 수 있다. 진공포장까지 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닌데 아직은 귀찮아서 못 하고 있다. 차를 많이 마시는 중국인이라면 분명 가정 차 전용 진공포장기기가 있거나 차상에서 해줄 법도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아직 노가다길 뿐인 것 같다.


차 소분은 어떻게?

1~2회 마실 분량으로 (3~10g)

빛을 차단하는 은박봉투에

실링기로 밀봉해서

별도의 차 서랍에 보관


녹차는 반드시 1회분으로 소분하자

우리의 냉장고에는 반드시 김치가 있다. 김치와 녹차는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고급차일 수록 1회분 마실 분량으로만 철저히 소분해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노동력이 많이 들지만 아직 대안을 찾지 못했다. 2,3회분으로 소분한다면, 한 번 마신 다음 차라리 부엌 식탁이나 침대 옆 선반 위에 놓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보이차나, 백차는 어쩔...

보이차나 백차 같이 오래 보관하면 맛과 차테크가 가능하다는 그런 전설의 차들은... 사실은 부동산이 필요하다. 보통 서재 같이 부엌과 멀고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서 공기를 통해가며 보관을 해야 한다는데.... 사계절... 장마... 더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겠다. 나는 재작년에 비로소 부엌이나, 김치냉장고 같은 곳과 분리해서 차를 보관할  있는 공간이 생겼지만 여름에  에어컨을  자신은 없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차를 많이는 사지 못하고 있다. 보이차는 그냥 최대한 부엌과   제조사에서 종이나 대나무 껍질로 포장된 상태로 소량만 보관하고 있고, 왕덕전에서  삼협백차는 그냥 밀봉해둔 상태다.(얘는 제조사에서도 밀봉해서 와서...)

+ 이런 종류의 차를 한 종류 더 사게 되어 이렇게저렇게 보관을 시도한 후기를 추가하였다.



어떤 봉투를 사용하면 좋을까?

고열을 가해 밀봉할 수 있으면서 빛과 공기를 차단해주는 은박봉투를 사용한다. 은박봉투는 보통 지퍼가 달린 봉투와 그냥 봉투가 있는데, 당연히 지퍼가 달린 봉투가 더 비싸고 부피를 많이 차지한다. 대신 지퍼봉투를 사용하면 좀 게으르게 소분하고 게으르게 마셔도 괜찮아진다. 이게 은근 고정적으로 살 만한 데가 찾기 쉽지 않으므로, 요즘 사는 데를 링크해두고자 한다.


차를 그렇게까지 자주 마시지 않는다면? 지퍼봉투

초기에 서양 홍차를 마실 때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다. 봉투 하나에 10g씩 넣고 실링기로 밀봉한 뒤, 5g을 마시고, 지퍼로 닫는다. 완전밀봉까지는 되지 않아도 남은 찻잎 5g을 1주일~10일 뒤쯤 먹어도 그럭저럭 괜찮다.

이 중 차 보관 용도라면 100x150 사이즈의 작은 사이즈가 적당하다. 100매 6,300원.


차를 거의 매일 마셔야 한다면? 일반봉투

허구헌날... 집에서 단가가 높은 잎차를 우려마시면서 사용하게 된 방법이다. 작은 일반봉투에 1회분씩 넣고 열심히 실링기로... 노가다 밀봉을 한ㄷㅏ.....

10g 용도라면 100x150이 적당하다. (100매 3,000원)

1회분 용도라면 80x120이 적당하다. (100매 2,900원)

줄기가 든 대만 우롱차는 10g으로 150ml 한 번 우려마시는 게 표준이라서, 그냥 10g 단위로 밀봉하고 작은 개완에 마시고 싶을 땐 가정용 밀봉 집게로 집어 둔다.

대충.. 이런 거

여러 번 우려야 하는 무이암차도 샘플에 든 걸 한번에 반씩 소비하고, 밀봉 집게로 집어둔다.

가정용 밀봉 집게로 집어둔 차는 무조건 3일 안에 마저 소비한다.

중국 녹차나 고급 차는 아예 작은 봉투에 3~5g 단위로 소분해 한 번에 마신다.


실링기

열을 통해 비닐봉투를 밀봉할 수 있는 가정용 기기를 구입할 수 있다. 내가 쓰고 있는 건 무려 7~8년 전 2만 몇천원 정도 주고 산 건데 아직 튼튼하게 잘 쓰고 있다. 밀봉기, 실링기 등의 키워드로 검색하면 더 좋은 제품이 나올 것 같다.


소분된 봉투에 입력(?)할 정보

제조사 및 다원

차 이름

소분된 용량(g)

상미기한 (또는 구입일)

프린트를 하거나 네임펜 같은 유성펜으로 쓸 수 있다. 나는 웬만해서는 글씨를 직접 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이거라도 해서 좀 수련한다는 마음으로 쓰고 있었지만 중국차와 함께 1회분 소분시대가 열린 뒤엔 은박봉투엔 안 쓰고 그걸 큰 지퍼백에 담아 그 위에 쓰고 있다. 나는 프린트가 더 귀찮아서 그렇게 하는데 예쁜 라벨을 만들어서 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차 보관 before & After (숙연...)

차 소분 과정

1. 은박봉투에 차 정보를 쓰거나 붙인다.

2. 차 무게를 저울에 단다.

3. 차를 은박봉투에 넣는다.

4. 실링기로 밀봉한다.

5. 차서랍에 보관한다.

이정도로 많아지면 도서관 라벨처럼 어떤 종류의 차가 있는지 빈 은박봉투에 라벨지를 붙여 인덱스 용도로 사용하면 편리하다.

티백 잘 보관하기

나는 아시아권의 티백차(루피시아, TWG)를 좋아하는데, 이 친구들은 대부분 티백 포장이 개별 비닐 밀봉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브랜드 차들은 종이 포장이거나 밀봉이 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아예 박스에 티백이 벌크처럼 한꺼번에 들어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보니, 최대한 싱크대와 멀고 높은 찬장에 보관해두거나, 아예 사무실에 들고가서 쌓아두는 편이다. 티백은 간편하다 보니 사무실에서 많이 먹기도 하고, 대부분 부엌보다는 보관조건이 낫다.

최근의 굳이... 그렇게까지...

실링기에 추가 구성품으로 추가 열선 및 비닐을 넣어줘서 교체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구매 6~7년 지난 걸 굳이 셀프교체를 했다. 아무래도 차를 너무 많이 소분하다 보면 종이컵이나 비닐봉투 같은 걸 많이 사용하게 되어 환경오염의 주범 된 것 같고... 찔린 것 같고...

가늘고 길게 하는 차생활

사람의 삶에는 늘 부침이 있고 차를 정식으로 우려마실 수 있는 시간은 짧다. 간단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좀 쉬어도, 보관만 제대로 한다면 차는 나의 몸이나 마음, 삶의 상태를 기다려 준다. 좁은 공간에라도 빽빽하고 둔둔히 차 봉투를 채워 두면, 마음의 창고가 채워진 것만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고야 마는 것 같다.

조금씩, 가늘고,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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