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그릇 박박 닦기를 참을 수 없었다
차를 도자기나 유리 그릇에 마시다 보면 늘 찻물이 들어 꾀죄죄해지곤 한다. 서양 다구도 빈티지쯤 되면 세제로 닦으면 안 된다던데 나는 늘 튼튼한 새것을 사서 막 쓰는 정책을 고수해 왔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심지어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 온 튼튼한 머그들은 식기세척기에 넣고 막 돌렸다. 웨지우드나 노리타케에서 나온 조금 더 섬세한 친구들은 차 마시고 바로바로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박박 닦으면 아스토니쉬 같은 전용 세제를 쓸 필요도 없었다.
중국식 다기들은 얇고 작으며 세제를 쓰면 안 된다는 데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유약이 발라져 있어도 얇아서 그렇겠지? 작고 얇고 손으로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는 기물들의 사용설명서엔 늘 세제를 사용해서 씻지 말고 물로만 닦아주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얀 다구에 찻물이 드는 걸 세월이 쌓이는 것 또는 일종의 미감으로 받아들일 문화적 배경이 나에게 없다는 것을 곧 인정해야 했다. 이러나 저러나 나는 그릇이 누래지는 걸 견딜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릇된 그릇 덕질을 하다 보면 아스토니쉬 티앤커피라는 제품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60-80도의 물을 붓고 얼추 반티스푼 정도 넣으면 뿌글뿌글 거품이 나면서 커피나 차때가 말끔히 지워지는 제품이다.
한통에 만오천 원짜리라 천연으로 만들어쓴다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경우엔 다구 청소 10년 했는데도 아직 한통을 다 못 썼다. 하지만 기포가 나면서 얼룩을 비롯한 표면을 약간 깎는 방식이기 때문에 작고 섬세한 동양다구들에 자주 사용하기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체감상 왜 더 빨리 찻물이 들어 얼룩덜룩 누래지는 느낌일까? 아무래도 세제와 수세미를 사용해서 박박 닦지 않기 때문일까? 특히 차호들은 뚜껑 안쪽에 유약도 바르질 않아서 막 샛노래지는데 이건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색감이다.
그래서 나의 참을성에 따라 4단계를 마구 왔다갔다하는 대충 생활이 되었다. 손이 큰 사람들은 작은 다구 닦다가 힘들어 죽는다는데 나는 손가락이 작아서 150ml짜리 차호에도 손가락 두 개 들어가는 사람이다 둠칫둠칫.
1. 물에 헹구고, 입에 닿은 곳만 손으로 대충 닦는다.
2. 다구 전용 망사 수세미로 살살 닦는다.
3. 세제를 살짝 묻혀서 닦는다.(3개월에 1회 정도)
4. 아스토니쉬 티앤커피를 사용해서 차때를 벗겨버린다.(1년에 1회)
누구는 막 베이킹파우더나 과탄산소다 넣고 삶기도 한다는데 그런 부지런한 짓은 못하고 아무튼 빨리 간편하게 박박 닦아 하얀 그릇이 되어야 기분이 좋은 한국인 어쩔 것인가… 유리 숙우 같은 건 그냥 조금 더 자주 세제로 닦기도 한다. 오히려 토림도예 빈티지블루나 자사호처럼 아예 원래 누런 친구들은 그렇게까지 안 닦아도 되는데, 특히 하얀 백자들은 얄짤없는 것이다. 토림도예의 빈티지 블루가 젊은 동양차 오타쿠들에게 국민개완이 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나는 조상님의 미감이 부르는지 늘 하얀색 다구들을 사버리고 만다. 그래도 맥파이앤 타이거 같은 데서 파는 하얀 무유 도자기를 살 깡까지는 없다는 게 다행이다. 자사호는 원래 흙색이기라도 하지….
은이나 금도금이 된 다구들은 좀 더 당황스러웠다. 오래 쓰다 보면 산화가 일어나서 치약으로 닦아줘야 하는데, 기포가 나는 방식보다 좀 더 과격하게 겉면을 깎는다.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깎아도 차를 마시지 않고도 공기중에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도금한 부분이 누래지곤 했다. 그래도 무늬만 금사나 은사로 그려진 경우는 따뜻한 식초물에 담그면 좀 선명해지는데, 다기의 안쪽이 전부 도금된 경우는 얄짤없이 쓰기 직전에 치약으로 닦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치약으로 거무죽죽하게 산화된 표면을 닦고 나서 한번 헹군 다음(치약맛 차를 마실 순 없으니까) 물기를 행주로 전부 닦아주면 변색이 덜 되긴 하지만 그냥 덜 될 뿐이다.
최근에는 천 재질의 차꾸(미기) 용품들을 많이 샀는데 대부분 세탁기빨래를 하면 망가질 것들 뿐이다. 티 매트에는 언제나 빨리 빨지 않으면 영원히 자국이 남는 찻물을 흘리게 마련이다. 집의 안 쓰고 오래된 상태로 방치된 샴푸, 클렌징폼 등이 차석(티 매트)과 차건을 손빨래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
차침이나 차시 같이 나무 재질로 된 것은 무조건 소모품이라 갈라지면 버리고 새로 사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사재기를 해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또 아직 그렇게는 못하고 있다.
사실 근년들어 나의 패션은 건조기가 정해주고 있을 정도다. 세탁기+건조기에 들어가지 않고 입었을 때 내가 하는 작업이나 취미, 생각이 아니라 옷매무새를 신경써야 하는 종류의 옷은 아예 입지 않는 자체가 라이프스타일이 되어버렸다. 그런 한편으로 기분이 좋기 위해서라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일까지 투덜대며 하는 모순된 존재임을 생각한다.
근래 들어 한국의 중고거래 시장에서는 희소성이 있는 90년대 이전 생산의 서양 빈티지 다구가 각광받되, 새 찻잔을 사면 그냥 웬만해서는 내가 쓰고 내가 쓰지 않으면 거의 가치가 없이 버려지게 되는 그런 물품이 된다. 최근의 서양 다구들이 산업의 전성기가 지나 더이상 본국의 공장에서 성의있는 방식으로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브랜드가 없는 동양식 다구라면 더욱더 아무리 비싸게 주고 샀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나에게만 의미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취미 물건을 살 때 환금성이 좋다면야 좋겠지만.. 그 외에는 남들이 어떤 물건에 어떤 가치를 매기는가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내가 보기에 기능을 다하며 기분이 좋은 것을 살 뿐이다. 어차피 그러하니, 나의 방식으로 가끔은 박박 닦아가며 하얘진 찻잔에 찻물 색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기엔 이미 슬슬 수집한 물건이 적지 않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박물관도 못 가는 시대에 옛날 미감의 모조품을 사서 쓰는 낙이 있으니까. 그냥 이러고 살고 있다. 이렇게 작작 사대다가는 저승에 가서 차나 마시라고 진시황 유품처럼 묻히겠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