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때 달라지는 차 경험 및 가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는 원래 차생활을 서양식 홍차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대만 우롱차, 더 멀리는 중국차의 세계관에 오니 복잡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게임으로 따지면 엑스트라 스테이지로 새로운 세계관이 열린 셈이었는데, 여기서 내가 겪었던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차 종류가 엄청 다양함
같은 종류의 차라도 생산자 및 지역에 따라 맛의 편차가 큼
차 종류마다 우리는 방법 완전 제각각.........
차 맛이 내 컨디션 - 기술 및 몸상태를 많이 탐
차가.... 아주 비쌈 (물론 맛있으니 자꾸 삼 큰 문제임)
심지어 가격에 변동이 제법 있음
이를테면 어제 A라는 차를 우렸는데, 한 달 전에 우렸을 때보다 맛이 없고, 한 달 전에 어떻게 우렸는지 까먹는 상황이 자꾸 벌어지는 식이었다. 기분탓인가? 아니면 내 몸이 안좋아서? 서양식 홍차를 마실 땐 꽃히는 차 몇 가지를 사서 맨날 돌려 마셨고 1분을 우리든 1분 30초를 우리든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 서랍에 몇 가지 종류의 차가 있는지 나도 모르는 상황에 접어들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차 구매 비용도 문제였다. 코로나 이전에는 대만에 가면, 비싼 브랜드에서는 150g 한봉지만 사고 디화지에의 차 도매상이나 개인 차상을 찾아가서 1kg씩 사온 것으로 1년을 나곤 했다. 하지만 집콕 생활로 인해 차 소비량은 터져버렸고 150g 1봉지만 사던 그 비싼 브랜드(왕덕전, 경성우)와 그 비싼 브랜드보다 더 비싼 브랜드(정산당, 서요량다원)에서 어차피 해외도 못 가는거 왕창 탕진길만 걷게 된 것이다. 돈을 많이 쓰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내가 돈을 많이 쓰고 얼마를 쓰는 지 잘 모른다는 건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가 속해 있는 IT/스타트업 업계는 심한 자기계발과 실시간 기록의 세상이라서, 2010년대의 에버노트부터 시작하여 개인적으로도 Note나 위키 류의 생산성 툴을 쓰는 사람이 많고 나도 그 중에 하나였다. 꽤 이것저것 난립해서 이직할 때마다 새로운 걸 배워야 할 정도였던 이 분야 툴은 최근 Notion이라는 툴이 월등히 앞서나가기 시작하는 중이다.
Notion https://www.notion.so/
여러 가지 기능을 전부 합쳐버려서 돈을 한 군데만 내면서 업무 관리 툴끼리의 연동을 신경쓸 필요가 없다거나(All-in-one), 기존의 다른 툴보다 예쁘고 힙해보이는 점, 작성한 페이지 그대로 공개 퍼블리싱이 가능한 점(그래서 요즘 스타트업 채용 페이지를 다 장악함) 등이 적은 인원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스타트업 회사에 큰 메리트로 작용했다.
하지만 개인 사용자라면 어떨까?
여기서도 개인 사용 무료라는 파격적인 가격 정책에는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차 마시고 산발적으로 트위터 정도에만 남다가 다 휘발되는 내용을 연속되는 형태로 남기기 위해 쓰던 Notion에 페이지를 하나 만들었다. Notion의 데이터베이스 기능은 엑셀 및 구글 시트 류의 스프레드시트와 출력 방식이 유사하다.
엑셀보다 더 좋은 점은 하위 페이지 형식으로 안에 노트 형식의 기록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차 우리는 방법, 가격, 온라인 링크 등은 데이터 테이블 형태로 만들고, 하위 페이지 안에는 사진이나 글 등을 넣을 수 있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좋았던 우리는 방식, 좋았던 차 등을 머릿속 바깥에서 관리할 수 있었다.
차에 대한 경험치를 정리하고자 하는 것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기초적 형태의 데이터베이스까지 사용해가며 이런 페이지를 만든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비용을 내가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있는 한국 원화 단위로 변환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국가 및 제조사마다 파는 잎차 및 티백의 양이 모두 달랐기 때문에 조금 더 표준화될 수 있는 단위의 가격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1끽다비용이다. 티백이면 티백 1개의 비용, 잎차라면 잎차 1회분의 g수로 따졌다.
1끽다비용 = 가격 / 한번에 판매하는 차의 양(g) * 1회분 양(g)
나는 늘 외화로 차를 구입했기 때문에 여기에 환율 계산식이 추가된다.
(해외차) 1끽다비용 = 현지 화폐 가격 / 한번에 판매하는 차의 양(g) * 1회분 양(g) * 원화로 환산한 환율(달러의 경우 오늘 기준으로 1114.29)
처음에는 차 산지 지역 별로 데이터 테이블 시트가 여러 개였다.(노션에는 한 페이지에 데이터 테이블 시트를 여러 개 삽입할 수 있다.) 가성비 덕후이다보니 원래부터 해외 직구를 좋아해 여러 가지 통화로 차를 사 마시다 보면, 유로부터 시작해서 싱가폴 달러, 엔, 파운드, 미국 달러, 타이완 달러, 중국 위안 등 결제 안 해본 통화가 드물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트가 여러 개다보니 마시는 차의 종류가 늘어날 수록 원하는 데이터를 그때그때 찾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조금 더 복잡한 수식을 사용해 모든 테이블을 하나로 통합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if 수식이 들어가는데 내가 개발자도 아니고 뭐하는 짓이냐...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기로 했기 때문에 해야지 뭐. 최근 2년간 샀던 차들은 대체로 대만이나 중국, 일본(루피시아), 싱가폴(TWG)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단한 구조를 만들었다.
지역이 대만이라면 -> 타이완 달러로 계산 (40.33)
지역이 일본이라면 -> 일본 엔으로 계산 (10.15)
지역이 싱가폴이라면 -> 싱가폴 달러로 계산 (841.64)
지역이 중국이라면 -> 미국 달러로 계산 (1114.29)
지역이 한국이라면 -> 환산하지 않음
노션에서 지원하는 if 형태의 수식을 사용한다면, 이렇게 된다.
if(prop("지역") == "타이완", prop("가격") * 40.28 / prop("단위(g)") * prop("1회분(g)"), if(prop("지역") == "중국", prop("가격") * 1114.29 / prop("단위(g)") * prop("1회분(g)"), if(prop("지역") == "일본", prop("가격") * 10.15 / prop("단위(g)") * prop("1회분(g)"), if(prop("지역") == "한국", prop("가격") / prop("단위(g)") * prop("1회분(g)"), if(prop("지역") == "싱가폴", prop("가격") * 841.64 / prop("단위(g)") * prop("1회분(g)"), 0)))))
환율을 어디서 자동으로 받아오면 참 좋은데 노션에서 어디까지 지원하는지 및 방법을 몰라서 아직 환율은 수동으로 입력하고 있다. 일단은 대략의 가격을 아는 게 목적이고, 달러-원 환율 정도 말고는 엄청나게 큰 변동은 없는 편이긴 하다. 데이터 테이블을 통합한 뒤로는 옛날에 이 차를 얼마 주고 어떻게 마셨더라? 를 검색으로 바로 알 수 있어서 편리해졌다.
데이터 양이 늘어나다 보면(2019년 이래로 마신 차만 정리했는데 벌써 줄이 105개가 되었다.) 여러 가지 기준으로 정렬해서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형태로 필터링한 보기들을 만들었다.
전체 : 기본 뷰
가심비 랭킹 : 선호도 높은 순 -> 가격 낮은 순
가격(비싼)순 : 1끽다비용이 스벅 아메리카노(4100원)보다 비싼 차들을 반성(?)하기 위해...
가격(싼)순
대만우롱 : 지역이 대만인 것
정산당 : 브랜드가 정산당인 것
노션에서는 꽤 상세한 필터 및 정렬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테면, 가심비 랭킹 보기는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대만차들의 경우는 가격이 비싸지만 쿠폰이나 할인 행사 등을 많이 하는 편이라서, 한 50%정도는 정가로 구매하지 않고 있다. 조금 더 싸게 나올 때 어떻게든 할인 가격이나 쿠폰을 붙여서 사려고 굉장히 애를 쓰게 되는데, 스프레드시트에는 기준이 되는 가격을 써야 하므로 정가를 입력하고, 댓글로 실제 구매 일자와 날짜를 적었다. 정산당 같은 경우는 대부분 샘플팩으로 마신 뒤 가격을 감안하여 구매를 결정하게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데이터는 샘플 시음 후 작성되었고, 틴으로 재구매한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런 포맷으로 댓글을 달았고, 댓글이 있는 경우는 리스트에서도 표시가 되기 때문에 실제 구매한 기록을 분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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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굳이.. 읽다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런 종류로 생겨먹은 걸 어쩌겠나요 그냥 웃지요. 사실은 늘 일도 이렇게 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그저 디자인 리소스나 가이드를 포함한 디지털 데이터가 산재된 상태로 있다면, 기초적인 형태로는 정리해야 효율적으로 꺼내 쓸 수 있다는 생각 및 습관을 가지고 있고, 취미 중에서는 가장 복잡계의 취미라 나름의 방법을 적용해 보았을 뿐이다.
굳이... 그렇게까지의 결과물을 소개하며 이번 턴을 마친다. (노션에서는 특정 페이지만 골라 웹에서 공유할 수 있게끔 하는 옵션을 지원하고 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굳이... 원한다면 템플릿 복제 해서 쓰셔도 된다. 취미가 되었든, 일이 되었든 경험의 공유에서 전반적인 결과물이 나아진다고 늘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