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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혁 Mar 11. 2023

인생의 미묘한 연출

다섯 번째 이야기

볼리비아 아마존에서 15시간 야간 버스를 타고 라파즈에 도착했는데 정거장을 착각해 30분을 더 지나서 내리게 되었다. 예약해둔 숙소가 중심가라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길을 찾아야 하는데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한 아저씨가 당황하며 한참 지도를 보고 있는 나에게 무슨 일이냐며 물어온다. 나는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고, 아저씨는 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곳으로 함께 가주겠다며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간단하게 스몰 톡을 했는데 아저씨는 오루로라는 라파즈에서 3시간을 더 가면 나오는 도시에 살고 있었고 오늘은 마침 오루로에서 일 년에 한 번 하는 볼리비아 카니발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라파즈에서 특별히 하는 게 없으면 오루로에 놀러 오지 그래요? 괜찮으면 내 집에서 재워줄게요.“


아마존에서 5일을 고생한 탓에 라파즈에서 이틀은 푹 쉬며 찍어둔 영상 편집을 하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는데 우연히 만난 사람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 간단하게 연락처만 주고받은 뒤 예약해둔 호스텔로 향하는 미니버스를 잡아탔고,그는 오루로행 버스를 타러 갔다. 당장 오늘이 시작이라니, 샤워하는 시간만큼만 고민했다. 카니발은 언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가자.'


마음먹자마자 주고받은 연락처로 메시지를 보냈고 버스 이름과 시간을 찍어서 보내주면 터미널에서 기다리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몇 시에 버스가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지도에 버스 터미널을 검색하고 최소한의 짐만 챙겨 터미널로 걸어갔다. 오루로 가는 버스는 마침 내가 터미널에 도착하고 10분 후에 있었다. 버스에 서둘러 타자마자 메시지로 버스 표를 찍어 보냈다.


오루로까지는 총 3시간이 걸렸다. 도착할 즈음 한 번 더 연락을 보냈는데 10분 후면 도착한다며 회신이 왔다. 사실 정말 잠깐 본 터라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아 먼저 나를 보고 누군가 손을 흔들어주길 바랐다. 그렇게 10분이 지나고, 누군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아, 맞아. 이제 얼굴 기억난다. 


사람이 정말 많았다. 절반 이상은 볼리비아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구경하는 사람이었다. 중심가에 있는 공원에 들어갔을 땐 마치 연예인이 된 것처럼 여러 사람들과 사진을 찍었다. 카니발에 놀러 온 동양인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밤 10시까지 대략 5시간을 함께 카니발을 즐기고 내일 또 놀기 위해 이제는 집에 들어가 쉬자더니 가는 길에 아저씨는 대뜸 저녁을 사주겠다며, 밥을 먹고 들어가자 하신다. 감자튀김이 들어간 닭고기 요리였는데 맛이 꽤 괜찮았다. 나는 먹으면서 여기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음식에 열중하던 우리의 정적을 깬 건 아저씨였다.


“혹시 여기 오면서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나 의심은 안 해봤어?“


아저씨가 물었다.


”저는 사람을 잘 믿는 게 단점이에요.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사람을 잘 믿는 게 장점이 되었네요.“


이렇게 큰 카니발에 왜 혼자냐고 물었다. 결혼은 안 했냐며. 아저씨는 10살 된 딸이 있다고 했고, 와이프랑은 몇 년 전 혼자 라파즈로 가는 길에 미니버스 타이어가 빠지는 바람에 차가 구르는 사고로 사별을 했다고. 아이는 어머니가 키우고 있고, 그 후로 카니발을 잘 즐기지 않게 되었는데 코로나가 끝나고 3년 만에 열린 카니발이라 혼자라도 즐기러 왔다고 한다. 아저씨는 잠깐 만난 자기를 믿고 와줘서 고맙다며, 나와 함께 카니발에서 보낸 시간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거라 하셨다. 


좋아하는 시인의 여행 산문에 나오는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러면서도 어떤 상황이든 설마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한번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여행은 끝이다. 그만큼 자유롭지도 못할뿐더러 기회도 적기 마련.’


이병률 시인의 여행 산문 ’끌림‘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늘 사람을 의심하고 생전 들어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 가는 걸 걱정하며 라파즈에 머물렀으면 과연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정말 카니발이 열리는지 인터넷에 검색해 보지도 않았다. 남들 다 가는 유명한 여행지만 찍고 찍으며 유랑하는 게 아닌 나만의 여행을 하는 것. 비록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일지라도, 그럼에도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경관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이 뭔지 알아가는, 나만의 여행 철학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날이었다.


아마존 근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터라 오루로에 있는 아저씨의 고향 집은 사람이 언제 머물렀냐는 듯 차가운 온기만 머무르고 있었다. 침낭이라도 가져왔어야 했을까. 고민하는 찰나에 아저씨는 잠깐 기다리라며 침대 매트릭스를 통째로 들고 오신다. 혹여나 내가 추울까 두꺼운 이불 세 장도 함께. 괜찮냐며, 더 필요한 건 없냐며 질문하던 아저씨는 문을 절반쯤 닫고 나가시더니 마지막으로 이걸 말해주는 걸 깜빡 잊었다며 문을 다시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다. 


“콘센트는 이쪽 벽 구석에 있어!”


그러고는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간다. 


사람이 머무르지 않은지 오래됐다고 누가 그랬던가, 방 안은 어느새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방에 가득 찬 온기만큼 내 마음도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감정으로 가득 찬 기분. 조금은 복잡한 감정에 얼른 글을 적어서 잘 보이게 정리하고만 싶은 기분. 밤은 점점 깊어가는데, 아침 7시엔 조식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는데. 눈은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닫힌 입 사이로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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