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이야기
제법 멋진 계획을 했다. 피츠로이에 올라가서 캠핑장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새벽에 일어나 2시간을 더 올라가서 7시에 떠오르는 일출에 비치는 피츠로이와 함께 멋진 사진을 남기는 것. 캠핑 장비를 빌려 3시간을 올라와서는 텐트를 멀끔히 치고 가볍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조금씩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났다. 태풍 수준으로 부는 비바람에 텐트가 요동치고 있었다. 가만히 침낭을 덮고 앉은 채 올라갈지 10분을 고민했다. 사실 고민해 봐야 달라질 건 없었다. 피츠로이 아래까지 와서 이미 하루를 잤는데 안개에 가려져 볼 수 없더라도 그것마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니까. 그렇게 비바람을 맞으며 정상에 도착했고, 피츠로이는 정말 새하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저기 어디에는 있겠지. 피츠로이가 있는 방향에 서서 사진을 찍고 다시 텐트로 돌아와 텐트를 걷으려 했다. 하지만 입고 올라간 두꺼운 옷 5겹은 빗물로 다 젖은 상태. 비바람을 맞고 있으니 저체온증이 왔는지 온몸이 덜덜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날씨도 날씨인지라 그날의 피츠로이는 올라오는 등산객도 하나 없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이대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텐트에 들어간다 해도 따뜻하지 않고, 젖은 몸을 말릴 수단도 없으니 절대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1시간 동안 텐트를 접었고, 다 젖은 텐트를 배낭에 넣을 수도 없어 10kg 가까이 되는 텐트를 손에 든 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하산을 하니 몸에 열이 조금 났는지 떨림은 서서히 멈췄다.
한참을 내려가는데 등산 중인, 나와 비슷한 몰골의 외국인 3명을 만났다.
“혹시 정상에서 내려오는 건가요?”
그들 중 한 명이 물었다.
나는 그렇다는 대답과 함께 정상에는 비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으니 올라가지 말라며 그들을 말렸다.
그러니 다른 한 명이 묻는다.
“그래도 Vale la pena(그만한 가치가 있다)였나요?”
No vale라 답했다.
“위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데다가, 오늘은 올라가면 안 됐다는 생각도 했어요. 지금은 내려가고 내일 다시 올라오는 건 어때요?”
셋은 내 대답을 듣고 서로 얘기를 주고받더니 내일은 집에 돌아가는 날이라 안 되겠다며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에 멍한 표정으로 그들과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반대 입장이 되어보았다. 나라면 오늘이 마지막인 날 피츠로이를 올라가는 길에 한 외국인이 가도 볼 게 하나도 없으니 올라가지 말라는 말을 했을 때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 결국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몇 시간 전만 해도, 비바람에 하늘을 온통 뒤덮은 안개를 보고도. 나는 바보스럽게 고생하며 온몸이 다 젖을 정도로 걸어 올라가 결국 안 보이는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내려오는 길이 아니던가. 저 멀리 점이 되어 올라가는 그들에게 피츠로이가 보이진 않았지만 적어도 내 발로 직접 비바람을 뚫고 올라가 확인한 건 가치가 있었다는 말을 해줄걸, 조금은 후회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후회하더라도 직접 경험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는 말을 좋아하면서 정작 남에게는 내가 해봤는데 별로였으니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을 나에게서 발견하니 나도 모르게 꼰대가 되고 있던 걸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들은 결국 정상에 도달했을까? 아니면 올라가다 비바람에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왔을까. 중간에 만난 외국인의 말을 들을걸, 괜히 올라왔다며 보이지 않는 피츠로이를 두고 후회했을까? 아니면 올라갔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며 웃으며 내려왔을까.
이루고자 하는 목표로 가는 길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험난한 과정을 미리 본 당신은 일찍이 도전을 포기하는 편인가? 아니면 감수하고 뛰어드는 편인가.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시도를 후회하는 편인가? 아니면 과정 자체를 즐기는 편인가.
모호했던 가치관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순간을 느낀다. 목표 지점에 도달했지만 원하는 결과가 없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며 과정에 웃을 수 있기를. 비록 결과는 아쉬웠지만 쏟았던 노력 자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즐기며, 또 그렇게 다양한 경험이 쌓여 새것이 두렵지 않은 날이 온다면 다시금 걸어온 시간을 뒤돌아 보며 웃을 수 있기를.
보이지 않는 피츠로이를 보러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