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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Jun Oct 26. 2022

제1장: 나를 알지 못하는 삶 (2)

두려움, 고통,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삶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쩌면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그저 달달한 말과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단을 통해 위로받으면서 타인과 상황에 일방적으로 맞춰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직장, 학교 등을 다니면서) 받는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내’가 없는 나의 모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타인만을 보면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나는 나와 내 주변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변화하지 않으면서 남과 상황만이 달라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항상 '어차피 지금 내가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다음에 하면 되지', '누군가 하겠지', '상황이 이런 걸 어떡하겠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귀찮아서 하기 싫은,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나는 언제나 착하고, 약하고, 남을 배려하고, 사회와 타인에게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상황과 타인을 탓하고, 상황과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일방적으로 (책임을 피하고 싶은) 자신에게 맞춰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생각과 태도 또한 스스로 맞다고 확신하지 못하기에 계속해서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이중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은 타인과 비교하여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본심과 행동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타인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솔직하지 않은 것으로 사실로서 믿고 의지할 곳을 잃은 사람은 계속해서 상황과 타인으로부터 쉽게 휘둘리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 간의 신뢰는 무너지고, 의지할 곳이 점점 없어지는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렇게 내가 무엇을, 왜,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한 삶의 기준점(‘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서 ‘나’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모순을 일으키게 되고, 이 모순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입니다.


상황과 타인에 따라 나의 삶이 결정되는 것으로서 최소한 믿을 수 있어야 하는 삶(‘나’)의 기준 없이 이루어지는 나의 생각과 언행은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와 상처를 주게 되고, 본인 스스로도 이에 휘둘리면서 고통받는 악순환에 갇힌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악순환 속에서 끊임없이 쌓여가는 모순들은 결국 모두를 속이는 거짓말로 이어지고 주체적인 ‘나’의 삶(생각과 결정)은 더욱 사라지게 되어 타인과 상황에 의해 결정된 삶 즉, ‘내가 없는 나의 삶’이라는 거대한 모순 속에서 살게 됩니다. 내 삶에서 그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면서 정작 나는 살아있는, 나의 삶 그 자체가 가장 근본적이고 거대한 모순이 되어 끊임없이 불행하고 고통받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약해진 자신은 더더욱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문제를 인지하는 관점과 방식 또한, 여타 다른 행동/생각과 마찬가지로 같이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면 습관처럼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라고 생각한 것을 해결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에게 진정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잠깐 동안은 행복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행복은 얻지 못하게 됩니다. ‘나’를 알지 못한 다는 것은 내가 삶을 살면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고, 이는 내가 느끼고 있는 스트레스와 두려움, 그리고 문제의 근본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잘못된 질문에 옳은 답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함으로써(무엇이 옳고 그르며 그 근거는 무엇인지, 무엇이 상대적이며 어디까지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인지 등) 끊임없이 발생되는 타인, 자신과의 오해와 갈등은 문제 해결에 피로감을 느끼게 합니다.


시간이 흘러 문제를 해결해도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을 찾지 못하는 경험과,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람 간의 오해와 갈등을 해결하는 것에 큰 피로가 누적된 사람은 점점 문제를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문제를 문제라고 애써 보지 않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도 의미가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삶을 살면서 상황 / 타인과 함께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오해와 갈등들을 마주하여 진지하게 원인을 고민하고 해결하면서 점점 능숙하고 책임감 있게 대처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회피하고, 무시하고, 그저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상황과 타인을 인지하고 적응하는 데에만 익숙해지게 되고 참고 견디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을 한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타인과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였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 가능한(타당한) 부분으로(어쩔 수 없는 사실로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과 삶은 원래 이렇기에 목표와 신념 같은 것들은 이상적인 것이며,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왜 원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이를 위해 변화하지 않았으면서 이런 지금 자신의 이런 모습이 현실적인 것이라 결정짓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모르는 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타인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무기력해집니다. ‘어차피 내가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으니까’, ‘원래 사회(현실, 인생)가 이런 거지’, ‘남들도 다 똑같아’, ‘사람은 변하지 않아’, '어차피 의미 없고 실패할 거야'와 같이 자신은 물론 타인과 상황을 추상적이고 주관적인(이기적인) 생각으로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편하고,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생각과 결정은 마음의 짐을 잠시나마 덜어줄 수는 있어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에 결국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는 후에 자신은 그저 참고 견뎌 왔던 문제점들이 해소되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닌 문제가 해소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 스스로 참고 견뎌왔던 자신이 착하고 옳은 것이라는 생각을 할 여지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인 사람은 쉽게 술, 담배, 게임, 심하면 마약과 같이 순간적으로 극단적인 도파민을 발생시키는 행동 등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왜 싫어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받게 되는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방법은 쉽고 빠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로 지친 일상의 유일한 돌파구가 된 만큼 더욱 빠르고 쉽게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술과 담배 등으로 잠시 잊고, 다시 일을 하고,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반복되는 삶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항상 가득 채워진 더 많은 항아리와 같은 행복을 원하지만 이 행복이 무엇이고 어떻게 이뤄야 하는지 모르는 본인은 정작 지금 자신이 물을 붓고 있는 항아리는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의 항아리만 보면서 물을 붓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기준에 가치와 목표를 맞추게 되는데, 보통 대부분의 타인들이 당연하게 원하는 돈, 명예, 권력 등이 됩니다.


타인과 상황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표면적으로 정해놓은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돈과 명예, 권력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이러한 것들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많은 돈과 명예, 권력이 인생의 최우선시되는 것으로 이를 자신보다 더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타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인생의 목표가 막연하게 타인보다 더 많은 돈, 명예, 권력이 되는 것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 또한, 이런 목적에 의해 맞춰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과 상황이 정한 행복을 따르는 사람은 막연하게 타인과 상황으로부터 내가 잘 보인다면 그 타인과 상황이 나에게 보상을 줄 것이라는 주관적인 믿음을 갖게 됩니다. 타인과 상황에 나의 행복을 맡겨 놓은 듯이 살게 되는 것으로, 타인과 상황의 눈치를 보게 되고 어떻게든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본인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인정과 부를 얻기 위해 일방적으로 그들이 원할 것 같은 자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얘기했듯이 타인과 상황은 결코 자신이 바라는 대로, 예상한 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막연한 이상과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으로서 결국 타인과 상황에(의 기준에) 더욱 집착하게 되거나 지쳐 포기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돈과 명예, 권력만이 옳고 그름, 승리와 패배의 기준이 되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짓을 하게 되며, 이런 자신에 대해 죄책감에 휩싸이면서도 끊임없는 합리화를 통해 점점 무뎌지고, 뻔뻔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동시에 타인과 상황에 따른 주관적인 기준을 삶의 기준/척도로 삼은 사람은 불규칙하게 변하는 타인과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흔들리면서도 점점 더 많은 주관적 척도를 갖게 됩니다. 이는 타인의 주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생성되는 기준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되고 우유부단해집니다. 또한, 한 가지에 오랫동안 집중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생각의 방향이 변화되기에 본인이 얻고자 하는 부/명예/권력을 더욱 얻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보통 부/명예/권력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사람의 목적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데, 이러한 목적은 대개 하나의 방향에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에 의해 존재하는 부/명예/권력인 만큼 타인을 납득시킬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이 타인에 의해 계속 변화되고 끌려다니는 자신은 결코 그러한 시간과 노력을 갖기 더욱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무수히 많은 주관적 기준들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참고, 견디고, 회피하는 경험이 쌓여가면서 자연스럽게 본인도 그러한 기준들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얻은 무수히 많은 기준과 이에 따른 열등감과 스트레스를 이러한 기준들을 통해 합리화시키고 잠시나마 위로를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준들이 있어야 본인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느끼는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본인의 책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인데,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유로서 받아들이는 이 기준들이 존재해야 남과 타인을 탓하는 자신이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점 위에서 언급한 이중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중적인 사람은 어떤 결정에 있어서 뚜렷한(납득할 만한) 방향이나 목적 없이 그저 본인이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해 버리면서도, 본인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면 온갖 핑계를 대면서 자신이 지키지 않았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게 됩니다. 정작 본인은 그렇게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밀게 되는데 본인이 스트레스받았던 이 잣대로부터 느낀 스트레스를 타인과 상황에 대한 분노로 쏟아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면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남이 하면 엄청난 범죄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주관적인 나만의 기준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강요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어떤 기준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많은 주관적인 기준이 지속적으로 하지 않을 이유가 되고 이런 자신을 합리화시킬 이유로서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즉, 본인은 점점 무력해지면서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분노만이 증폭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자세와 그에 따른 기준은 이기적인 편견이 되고, 이것이 자신의 집착과 더해져 타인과 세상에 대한 원망, 분노와 질투,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자신에게 스트레스 준다고 생각되는 모든 타인과 상황에 대한 분노, 혐오, 무시, 가해 등이 발생되는 것으로서 주변의 타인과 상황에서 쉽게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러한 처지를 위로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상황이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불만을 표출하게 되는데 타인과 상황에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불만을 들어주지 않으면 대상에 대한 혐오성 표현까지 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초한 것과 다를 게 없는 불행과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는데 안간힘을 쓰고 위안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악마와 다를 게 없다.)


대표적으로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돈, 권력, 명예에 의해 만들어진 무수한 기준들과 그로부터 받은 스트레스와 절망을 다른 사람들도 느끼기를 원하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혹은 더 심하게)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동안 쌓인 집착과 스트레스로 이어져 더욱 극단적인 언행으로 표출됩니다. 당사자가 이런 자신의 언행으로 얼마나 상처받을지, 지금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극단적인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그저 당장 나의 스트레스와 분노를 풀기 위해 스스로 그것을 만들고 사람들을 고통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나는 타인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인 것 같고, 내가 불쌍하고 착한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동시에 타인이 자신보다 불행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점점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언행,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고 자신의 기분과 이익만을 위해서 뻔뻔하게 어떤 짓이든 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상황과 타인 때문이며 자신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과 언행에 대해 타당함을 느끼고, 동시에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결과적으로 풀 수 없지만)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를 모르는 삶은 평생을 남에게 의존하면서, 눈치 보면서, 상황에 스스로를 깎아 구겨 넣으면서, 타인을 욕하고, 비웃고, 비방하고, 해치면서, 이루지 못할 행복을 위해 망가지는 삶인 것입니다. 스스로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 거대한 모순에 빠져 끊임없이 더욱 극심한 고통을 만들고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지금이 순간, 내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 고민을 하는 지금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길에 비유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남겼던 발자국들(수많은 결정들과 그 근거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었고, 잘 가고 있는지,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옳은 목적지인지,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목적지가 맞는지 생각해 보고 지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목적지와 걷고자 하는 길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동안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알고 고쳐 나가면서 내가 되고자 하는 '나'의 모습과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알고 있는 자신을 잃지 않도록 나의 생각과 결정으로 이뤄진 발자국을 하나의 공통된 기준과 목표 아래에서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목적지(목표, 삶의 방향)와 가려는 길(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가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 이런 기준과 근거를 잡지 못한 채 자신이 생각한 ‘나’의 삶이(가고 있는 방향과 길)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면(맞는지 증명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흘러 다시 수많은 주관(타인과 상황)에 의해 흔들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이런 선택과 결정을 했는지에 대해 스스로는 물론 타인에게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또는 납득시키기 어렵다면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결정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단단한 뼈대 없이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스스로가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철학이 존재하지 않은 채 ‘나’의 삶을 단정 짓고 살아간다면 그 삶은 결국 무너지거나 처음 의도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형태는 콘크리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뼈대(철근)처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자신에게 큰 혼란과 절망 그리고 포기를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성찰하면서 결정하고 살아가기에 앞서, 먼저 어떤 상황과 타인에도 휘둘리지 않는 기반을 갖춘 기준과 생각(철학)을 알고 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잡아 그 위에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결정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결정한 삶이 분명 내가 옳다고 결정한, 나를 행복하게 해 줄 나의 삶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반복적인(의미 없는) 의심과 망설임 없이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부터 자신의 삶(시간)을 깎아내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확실하게 알아내서 전부 지워버리고 온전한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통해 저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결정들과 생각들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민에 빠졌습니다. 과거에 내가 내렸던 결정과 생각들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분간하는 기준과 함께 이 결정이 정말 내가 내린 결정이 맞는지에 대한 기준을 잡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 내가 내렸던 결정으로부터 나의 생각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내가 어떤 기준을 갖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과거의 생각, 결정이 진정 나의 생각과 결정이었는지, 옳은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불확실하고 부분적인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어떤 결론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으며, 결론을 내린다고 해도 굉장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여지가 다분하여 ‘나’를 확실히 정의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점점 확실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확실한 '나'의 생각과 기준 없이 살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내 생각과 행동 그리고 결과에 대한 인과관계를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회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회상을 통해 나의 생각과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생각했지만 모든 정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스스로 틀린 것을 인정하여 불편함과 책임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해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데 이렇게 됐구나, 그럼 앞으로 이렇게 해야지/하지 말아야지’와 같이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과거에 내가 그렇게 했던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야’와 같이 타인과 상황을 탓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온 결론은 어느 것 하나 맞다고 확신할 수 없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객관적 사실인지, 주관적 감정/생각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결정짓지 못한 채 혼란과 스트레스만 가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을 통해 ‘나’에 대해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 확신하는 기준을 갖고, 내 생각과 결정에 대한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사실을 통해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객관적인 기준 없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기억의 조각을 들추면서 자신을 알고자 했던 주관적인 사람에게 확신할 수 있는 ‘나’를 알 수 있는 방법이란 애당초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고 잘했는지, 앞으로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이 어떤 삶이고 옳은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과 확신이 있어야 ‘나’를 바로 알고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옳고 그름에 관한 기준과 근거를 정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기준과 생각(철학)은 앞으로 맞닥뜨릴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 속에서 적용될 수 있으면서 평생 믿고 따를 수 있어야 하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라도 누군가의 삶에 가장 근본적이라 할 수 있는 기준과 생각이 논리적으로 부정당할 수 있다면, 이는 그 사람의 삶에 큰 모순과 문제가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모두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당연한(절대적인) 사실들을 바탕으로 논리를 구성하여 삶에 대한 기준과 생각을 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기준과 생각이 모두에게 간단히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당연한 사실로서 절대적인 옳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접근으로 확신할 수 있는 삶의 기준을 잡고 그 위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면 비로소 ‘나’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나’의 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나의 목표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한다면 최소한 내가 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큰 의심 없이 지금 나아가고 있는 나의 삶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정하고 행동하기에 앞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옳은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어떤 기준에서 옳은 생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절대다수의 행복을 위한 생각?, 자신만의 행복을 위한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한 생각?, 약자들을 위한 생각? 여러 답안을 생각해 봤지만 모두가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답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틀릴 수도 있는 답이었습니다. 모든 답안의 근거가 주관적이면서도 부분적이었는데 위와 같은 답들의 근거는 전부 나와 과거 사람들의 경험에 의존했으며 몇 가지 상황에 우연히 들어맞았던 경우로 전체를 판단해 버리는 일반화의 오류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왜?’라는 질문을 하면 할수록 답변은 점점 모호해졌으며 결국 처음 답안에 부합되지 않게 되면서 항상 반박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다수와 개인이 가진 행복의 기준, 사랑의 기준, 약자의 기준이 서로 다르고 매우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질문을 통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고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기 전에 그 생각을 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현상과 존재에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어떤 현상과 존재가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이 존재가 어떠한 목적과 함께 그것을 이루기 위한 특정 형태와 움직임으로 존재한다는 정보를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어떤 존재/현상의 이유(원인)를 알 수 있다면 진정한 존재의 목적과 그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지금 삶을 고민하는 나는 왜 존재하는 가?'에 대한 것이 됩니다. 여기서 나는 삶 그 자체이므로 삶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삶은 왜 존재할까요? 기본적으로 삶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 더 중요한 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이는 삶의 목적이 더 많은 가치를 얻는 것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삶은 언제나 가치를 추구하며 이를 통해 삶의 존재 가치와 함께 삶의 존재 이유를 느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인 삶의 가치를 충족시키면서 삶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가치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삶이 어떤 형태와 움직임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삶의 가치는 삶의 형태와 움직임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형태와 움직임은 지금 우리의 삶이 실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마치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물건이나 자연처럼 말입니다. 즉, 객관적인 사실로서 삶의 형태와 움직임은 존재하는 것으로, 만약 이를 알 수 있다면 삶의 근본적인 가치/목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객관적인 사실로서 삶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삶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객관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이해하게 된다면 삶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분명한 사실)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삶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면 원하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은 ‘삶은 어떤 형태와 움직임을 갖고 있는 가?’이며 해답은 절대적인 사실들이 증명하고 있는 근본적인 개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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