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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Jun Oct 26. 2022

제1장: 나에게 삶이란? (1)

나는 누구인가? 삶은 무엇인가? 나를 알지 못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합니다. 다가올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와 같은 사소한 결정부터 자신의 인생을 정할 수 있는 무거운 결정까지, 다양한 결정을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을 하면 그 결정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고민과 결정이 이어지고 이로 인한 결과를 통해서 다시 고민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으로 삶이 구성되고 이렇게 구성된 삶은 곧 지금의 자신을 의미합니다. 즉, '나'라는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대답을 하실 건가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함이 먼저 느껴질 겁니다. 각각의 상황마다 판단 기준이 다르고 그 기준의 근거도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평생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하지 못하는 걸까요? '나'에 대해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 수밖에 없는 내가 '나'를 알지 못한다면 자신 이외의 다른 무언가를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타인보다 자신에 대한 정보가 훨씬 많고 정확할 내가 ‘나’를 모른다면 타인과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상황을 알아야 적응할 수 있고 사람을 알아야 친해질 수 있기에 다양한 상황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는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반이 됨을 의미하기에 보다 신중하게 고민하고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자신에 대해 잘못된 방향으로 알게 된다면 다른 것들도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이는 삶에 큰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나'를 알 수 있을까요? 앞서 얘기했듯이 '나'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지금까지 내렸던 수많은 생각들과 결정들이 어떤 일관성(공통점)을 가지고 가리키는 방향이 있다면(내 생각들의 근본을 알 수 있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수많은 결정들과 그 결정을 내리게 한 생각을 돌아보았을 때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관심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내가 과거에 생각하고 결정했던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결정과 생각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왜 좋아하는지, 왜 싫어하는지 등을 알고 나서 그 생각의 공통점을 찾아보고, 만약 찾지 못했다면 '왜 좋아하는지의 근거', '왜 싫어하는지의 근거' 등을 생각해 보면서 공통된 생각이 나올 때까지 왜?라는 질문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를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서로 다른 결정끼리 공유하는 생각과 기준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의 공통점을 탐구함으로써 스스로 다양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옳고 그름의 기준), 그리고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나는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목적(되고 싶은 '나', 나의 목표/계획들, 나의 철학 등)을 이루고 싶은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길에 비유해 보면 내가 지금까지 걸었던 발자국을 봤을 때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었고, 잘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길이 옳은 길이면서 동시에 내가 원하는 길인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만약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체적인 목표(내가 믿는 기준에 부합하면서 목표를 달성할 때 행복이 느껴지는 기준/목적)를 가진 자신이 보인다면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나’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떠올리고 목표의식과 행복감을 느낀다면, 스스로 자신을 확신하는 데 있어서 의심의 여지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면 지금 잠시 멈춰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내린 결정들이 나를 결론짓지 못한다면(공유하는 생각이 없다면) 그 결정은 온전히 자신이 내린 결정이 아니라 타인과 상황에 의한 결정이라는 것이고, '나'는 지금까지 그 결정들에 따라 살았던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나'의 기준에서 타인과 상황을 해석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저 타인과 상황에 의해 결정되고 행동한 것입니다. ‘나’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이는 스스로의 결정보다  타인과 상황에 의존하고 따르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타인의 의도에 따라서, 혹은 상황의 분위기를 따라서 결정한 것인데 대표적으로 ‘예전부터 그렇게 해와서’, '다 그렇게 하길래',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여서’, ‘이렇게 하라고 해서’ 등과 같은 생각들입니다. 이런 생각과 결정은 상황과 타인에 의해 쉽게 바뀔 수 있으며 누구나 간단하게 할 수 있는, 타인과 상황을 인지할 뿐인, 표면적이고 단순한 생각입니다. 즉, 이렇게 상황과 타인을 인지하는 수준의 생각과 결단은 '내'가 없었던 결정으로서 온전히 자신이 내린 결정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과 결정도 분명 자신이 한 생각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상황과 타인에 의해 결정된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항상 모든 상황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떠올리고, 생각하고, 결정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급박한 상황이나 사소한 상황에서는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지 않고 좀 더 신속하게 또는 편하게, 때로는 재미를 위해 쉽게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생각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상황의 흐름에 좀 더 집중하고 고려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혹은 안다고 해도 이런 결정들이 편하고 빠르고 재밌다는 이유로, 이렇게 하면 타인에게 미움받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살아간다면, 내 인생에서 나의 생각은 점점 희미해지고 시간이 지나 본인에게 중요한 결정에서 상황과 타인에 의한 결정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과거 나의 선택과 생각에 대한 후회와 이로 인한 자책이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원인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타인과 상황에 의한 결정을 온전히 자신이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자책하는 경우로서, 이 경우에는 내가 책임감을 느끼고 자책하는 그 결정과 생각이 정말 내가 내린 결정인지부터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자책해야 할 것은 그 결정/생각을 한 본인, 그 결정을 하게 한 상황과 타인이 아닌 ‘내’가 없는 나의 모습 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는 나의 결정/생각에 대해 자책한다면 이는 모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 순간 자책을 하면서도 정작 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나를 정의하는 진실된 나의 모습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과거를 결과나 원인에 따라 후회하거나 뿌듯해하면서 정리하기 전에(‘그런 결정하지 말걸…’, ‘앞으로는 그렇게 결정하지 말아야겠다.’, ‘상황이/타인이 그래 가지고’, ‘이렇게 하길 진짜 잘했네’, ‘앞으로도 이렇게 해야겠다’ 등) 내가 왜 그런 생각과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의 끝에서 자신의 공통적인(근본적인) 생각과 기준이 보이지 않는다면, 내 결정과 생각에 대해 타인과 상황을 걷어내고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나를 정의하는 ‘나’의 결정이 아닌 것으로서 자신을 정의할 수 없는 순간인 것입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상황과 타인에 따라 일방적으로 바뀌고 결정되는 시간들로 삶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시간(과거)으로 지금의 자신을 정의한다면 더욱 자신이 누구인지 더욱 알기 어려워질 것이고 타인과 상황에 쉽게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내가 무엇을 어떻게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내가 원하는 행복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타인과 상황이 아닌 자신의 생각/감정과 결론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나’를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왜 그런 결정을 했고, 그것이 과연 옳았는지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알게 되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나의 목표를 향해 강한 믿음과 함께 끊임없이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진정한 나를 마주한 채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 지, 왜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나의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고 자문하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잃지 않고, 과거보다 더 나은 나로 발전시켜 나가는 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상황에 따라 내가 내린 결정과 아닌 결정을 구분할 수 있게 되어 자신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빠르고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일과 그렇지 않아도 될 일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진정한 자신의 문제와 목표를 빠르게 명시하고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나의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면서 나를 정의 내리는 공통적인 생각과 기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다시 한번 명확해질 것입니다. 또한, 다양한 상황에서 나의 실질적인 문제와 목표를 마주하기 때문에 나를 정의 내리는 생각과 기준들이 많은 상황에서 적용되고, 확장되고, 발전될 것입니다. 점점 나를 정의 내리는 생각과 기준들은 많은 상황에서 빠르게 실행될 수 있을  것이며, 이렇게 발전하는 모든 생각/행동은 점점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내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공통적인 생각과 기준을 통해 나를 정의했기에 내 모든 결정은 근본적으로 내가 선택한 나의 책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온전히 납득한 나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할지 결정할 때, 나의 삶은 진정한 나의 책임과 함께 변화되는 것입니다.  최소한 내가 결론지은 나의 공통적인 생각은 스스로 납득해서 내린 결정인 만큼 '어떤 타당한 이유로 이러한 결정을 했다'라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납득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으며, 이러한 결론을 도출한 것은 그런 이유에 따른 나의 결정인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통틀어 근본적으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생각과 감정이 유일하다는 사실에 따라 내가 가장 집중하고 신중해야 할 것은 내가 나의 생각과 감정을 결정짓는 나의 공통적인 / 근본적인 생각과 기준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나의 감정과 생각을 내가 납득할 이유로 정의하고 결정지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의 삶은 나의 (내가 납득한 = 내가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결정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있습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나의 공통적인 생각을 정의 내리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 기준은 어떻게 잡을 수 있을 까요? 또한, 여러 상황에서 내가 내린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존재와 현상에 대해 이해/납득하기 위해 언제든지 증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기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물이 밑으로 떨어지는 현상은 언제든지 증명가능한 존재로서 하나의 사실로서 정의되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분명한 기준이 되었고, 이 현상으로 하여금 많은 기술들이 발전해 왔습니다. 즉, 언제든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을 기준으로 삶은 발전하면서 인류의 역사는 과거부터 끊임없이 성장해 온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삶은 개개인이 납득하고 있는 삶의 기준에 따라 결정되고 정의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삶은 내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생각과 기준에 따라 정의되는 것으로서 내가 언제든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생각과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어떤 생각과 감정을 신뢰하지 못할 것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내가 납득하고 있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은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내리고 있는 결정이 결코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보다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결정짓는 기준이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보다 많은 상황과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다면 스스로를 명확하게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이러한 나의 삶(생각과 결정) 이 옳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 없이 계속해서 '나'를 모르는 상태로 정처 없이 나아간다면 길(‘나’)을 잃게 되고 그로 인한 막연함과 두려움은 자신을 점점 희미하고 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는 기준과 생각이 없다는 것이자, 내가 어떤 결정을 할지 모른다는 것으로서 타인과 상황의 결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결정에 의존한다는 것은 타인의 기분에 쉽게 휩쓸리고, 타인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으로서 타인에 의해 쉽게 상처받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상황에 의존한다는 것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상황을 인지하고(내 기준과 생각에 있어서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황에 자신을 맞춰서 사는 것으로 막연하게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무력한 '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해진 자신의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에 대한 불만과 과거의 후회, 미래의 불안함을 만들고 가중시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나의 모습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은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으며 각자의 안심과 행복이 더 우선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황에 따라 결정된 ‘나’ 또한 지금껏 마주한 대부분의 상황들이 타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 관련이 없다 해도 상황 자체는 어떤 의도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신의 행복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는 결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혹은 상황에 따른 나의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삶) 성공과 행복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자신만의 기준과 생각 없이 타인과 상황에 의존하며 약해진 자신은 자연스럽게 멀어져 가는 행복과 쌓여가는 스트레스 속에서 불만과 후회, 불안감이 쌓여가게 됩니다. 여기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해 타인과 상황에 대한 배신감과 후회, 이렇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큰 분노를 느끼면서도, 내가 없는 나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못한 채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한 심정으로 혼란과 절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배신감과 후회를 준 타인과 상황의 결정에 의존하면서 살아온 '나'는 스스로 결정하고 나아갈 힘과 방법을 모르기에 불안과 불만만 터뜨리면서 또다시 타인과 상황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면서 스스로 결단을 내릴까 하다 가도 ‘나’를 알지 못하는 상황(=‘나’를 모르는 나를 모르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유부단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생각하고 결정지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치게 되고 결국 그동안 의존해 왔던 타인과 상황에 더욱 의존하게 되어 '나'는 더 힘들고 약해지게 됩니다. 


동시에 자신의 끊임없는 의존과 불만, 여기서 만들어지는 우유부단함은 본인에게도 힘들지만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신이 크게 의존하고 있는 인간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같이 일을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여행 등을 갈 때 우유부단한 생각과 행동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답답함을 유발하고 시간을 지체시킴으로써 다양한 문제들을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상황이 잘못되면 문제를 회피한 채로 다양한 핑계와 남 탓을 하게 되는 데, 본인이 내린 결정은 본인한테 있어서 단 하나도 없으며 자신은 그저 따랐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정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사람 간 갈등을 유발하면서도 이를 해결하는 데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스트레스가 발생하는 만큼 같이 무엇인가를 하는 데 있어 잘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상대방의 믿음을 상실하게 됩니다. 점점 다른 사람과의 갈등과 불신은 커져가게 되고 사람들은 점차 떠나게 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찾아오는 외로움은 끊임없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게 되고, 이러한 자신을 만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도 알지 못한 채 체력적, 정신적으로 더욱 약해지게 됩니다. 스스로 어떤 문제를 찾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고 살면서 감내해야 할 할 최소한의 고통들(최소한 짊어져야 할 책임)을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본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더욱 회피하거나 보지 못하게 만드는데, 자신의 처지에 대해 타인과 상황(본인이 처한 사회, 정치, 문화 등)만을 탓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성찰하고 이해하여 결정한 적이 없기에 지금 느끼는 불행과 고통의 근본적 원인인 자신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는 것인데, 두려움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더욱 알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생각과 기준이 무엇이며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다양한 생각과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할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은 이를 막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두려움은 타인과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만큼 자신의 문제에 대해 타인과 상황만을 탓하게 됩니다. 이렇게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과 살면서 필연적으로 이겨내야 하는 고통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게 되고 스스로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생각하게 됩니다.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나’는 자신의 합리화에 대해 타인의 인정을 받아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바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이런 행동은(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인간의 본능에 의한 것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문제를 알지 못한 채 그저 회피하기 위한 문제 제기는...


(진정한 나의 문제를 보지 않은 채 이런 자신의 문제를 감추기 위한 남 탓과 상황 탓, 그리고 여러 핑계를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

... 결과적으로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다는 점에서 자신과 상대방에게 무의미한 시간을 만들고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됩니다. 문제라고 결정지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주체적으로 어떤 확실한 기준을 기반한 원인과 해결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문제 제기는 근본적으로 어떤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는데, 그 어떤 생각도 확신할 수 없기에 오해와 갈등만이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회피하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타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의 인정과 위로를 일방적으로 원하게 됩니다. 이는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같이 문제를 생각해 보면서 위로, 용기, 깨달음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 그저 주변 사람들(타인)에게 위로받으면서 자신의 합당함과 불쌍함을 인정받아 자신의 처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잠깐이나마 줄이고 싶은 것입니다.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타인들에게 주관적인 한탄을 늘어놓게 됩니다. 이렇게 ‘나’를 알지 못하는 나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책임을 계속 회피하게 되는 것으로 나의 삶에서 스스로가 도망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절망, 후회만이 가득한 채 주체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타인의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고, 스스로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문제를 통해 자신의 불쌍함과 합당함을 주관으로 지어내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애처로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 대한 구체적인 이유와 이를 해결할 방법에 대한 생각보다도 자신이 느낀 분노와 슬픔, 짜증, 절망, 불쌍함 등을 남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알리고 위로받을 수 있을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책임을 온전히 없애면서 완벽하게 타인과 상황을 탓할 수 있을지, 이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는지를 우선으로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타인에게 스스로의 고민과 걱정, 짜증 등에 대해 말을 할 때 자연스럽게 본인에게 유리한 주관이 계속해서 들어가게 되고 스스로를 보기 좋게 포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타인과 상황을 더욱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도 속이는 것으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 아니라 타인과의 신뢰도 잃게 됩니다. 스스로를 보기 좋게 포장한 자신의 모습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므로 자신의 진실한 과거와 지금의 내 모습의 차이에서 모순을 일으키게 되고, 이 모순은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나의 모습인지에 대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알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서 상황과 타인에 의해 더욱 심하게 휘둘리게 됩니다. 


동시에 이런 상황과 모순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없애기 위해 타인과 상황에 따라 계속 말과 행동이 달라지게 되는데, 결국 자신에 대한 혼란과 함께 타인과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타인이 본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이중적이면서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지 점점 알기 어려워지고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깊어지는 불신과 갈등, 오해는 계속해서 나로 하여금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하게 되는데 이 거짓말은 이전 거짓말로 오는 책임을 회피한다는 목적 아래에서 이뤄지는 만큼 자신과 타인, 상황을 점점 더 극단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는 그보다 큰 거짓말이 필요하기에 나의 주관은 점점 극단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일반화의 오류와 함께 피해망상적인 생각으로 뻗어 나가게 되고, 두려움과 절망은 극에 치닫게 됩니다.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절망적인 세상(타인과 상황) 때문에 무엇을 해도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모든 의욕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점점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되고, 점차 갖고 있는 게 적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면서(동시에 실제로 적어지면서) 사소한 것에 대해 더 크게 절망하고, 후회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타인이 끊임없는 자신의 짜증과 한탄을 받아주지 않으면 얘기를 들어주는 상대방에게 짜증과 화를 내게 됩니다. ‘왜 이런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지’, ‘왜 내 탓을 하는지’, ‘왜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지’ 등에 대해 불평하면서 오로지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지 않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자신의 이런 분노와 슬픔에 대해 또다시 남 탓을 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을 한 것이고 상대방의 인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타인을 그저 자신의 순간적인 안도와 쾌락을 위한 도구로서 생각하는 것으로,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조언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언을 해준 타인을 탓하고 무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더욱 외로워진 자신을 또다시 불쌍히 여기면서 다른 타인에게 한탄을 풀어놓습니다. 스스로 그 어떤 것도 노력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한탄하고 짜증 내고 슬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행동과 생각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아이처럼 자신의 문제를 보려고 하지 않은 채 무조건 이해해 주고 위로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나'의 문제점과 자신이 살면서 짊어져야 할 기본적인 책임감(결정)을 짊어지고 싶지 않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아는 것이 없기에 가르쳐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주변 사람들이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받아주고 이해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같이 있으면 힘들고 스트레스만 받는(시간 낭비만 되는) 사람과는 더 이상같이 있고 싶지 않은 것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 주변의 사람들이 끝도 없이 자신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겨줬으면 하면서도 자신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외로운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어린아이 같은 어른이 된 ‘나’로부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점점 떠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외롭고 우울해지는 나는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며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이 세상이 잘못되고 이상해서 지금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단정 지어버립니다. 또다시 큰 슬픔과 절망을 느끼면서도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떠나가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외롭고 추운 자신만의 작은 방구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방구석에는 애처로운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기 위해 끊임없는 남 탓과 자기만족(술, 담배, 약물, 그 외 순간적인 도파민을 발생시키는 행동들)을 반복하는, 자신도 모르는 피폐한 사람만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타인이 상처받고 힘들어할까 봐 말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으나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절대 아니므로 혼자서 앓다가 더 빠르게 안 좋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나’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혼자 모든 생각들을 담아두고 참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로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참는 것은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치닫게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혼자서 모든 스트레스를 담아두는 것은 결국 시간이 지나 인내심의 한계를 돌파하여 터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터진 후 이뤄지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을 배려한다는 생각으로 혼자 담아두었던 고통스러운 시간들에 대한 보상으로서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강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를 기반으로 하는 행동은 극단적일 수 있습니다. ‘자신은 지금껏 이렇게 참아왔고, 그 누구도 자신의 이런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하며, 나는 충분히 주변 사람들을 배려한 착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지금 나의 생각과 행동은 타인에게 피해를 줄지 언정 그럴 수 있는 것이며 이 또한, 타인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난 충분히 참아 왔기에 이렇게 해도 괜찮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터뜨리듯이 나오는 생각과 언행은 극단적일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말하지 않아 그 사람에 대해 잘 알 수 없었던 타인에게 그러한 언행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뻔뻔하고 가증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괜찮다고 거짓말을 했으면서 갑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탓하고, 이해되지 않는 이기적인 언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타인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면서 인간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평소에 자신의 생각과 기분을 다른 사람에게 잘 표현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이 표현하는 감정과 생각을 쉽게 믿을 수 없게 되기에 신뢰로 유지되는 인간관계에 큰 문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로,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결정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채로 타인에게 모든 것을 말하는 것 또한, 위에서 얘기했듯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과 자신의 고민(스트레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들의 조언을 그저 받아들인다고 해도 반드시 옳은 결과로 나아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나보다 나를 모르는 타인의 생각에 따라 내 생각이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내가 고민해서 납득한 것이 아닌 그저 다른 사람이 시켜서 한 것과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본인이 생각할 때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해서 이뤄진 것이 아닌 타인의 기준에 의해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시간이 지나 잘못될 시 남 탓을 할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조언으로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이 만들어진 건지에 대한 의구심이 발생할 여지도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주변 사람들과 깊이 있게 얘기를 한다고 한들 조언이 잘못되었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더욱 좋지 않은 상황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타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타인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더욱 중요시 여긴다는 점, ‘나’에 대해 자기 자신보다 훨씬 아는 게 없을 수밖에 없다는 점, 어떤 문제에 대해 ‘나’의 말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단정 짓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알려주고 이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설명해 줄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적은 가능성조차 스스로 그 어떤 확신이 없다면 조언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으므로 그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합니다. 즉, ‘나’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가 납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의 조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상관없이 타인을 탓하거나 의존하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나’의 삶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결정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떠넘길 여지가 분명한 사실로서 조금이라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문제에 대한 본인의 감정과 생각을 결정짓고 타인의 조언을 듣기 전에 자신의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옳은지, 그른 지에 관한 주체적인 기준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납득한 나의 기준에 따라 문제를 정의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나의 생각을 결정할 수 있어야지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과 결론을 정립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사람들과 공유할 때 비로소 진정한 나의 문제와 목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바라볼 때 ‘나’의 문제는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내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을 통해 내가 이것을 왜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본인만의 논리적인 생각과 기준을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사람들이 나의 이런 생각에 대해 각자의 생각(조언, 공감, 위로)을 말해줄 때 비로소 그들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여 내가 납득한 나의 결정으로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타인과 상황을 통해 얻은 수많은 문제와 인사이트는 내가 납득할 때 비로소 나의 삶으로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각과 결정들은 근본적으로 타인과 상황에 크게 의존하게 되고 쉽게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서 ‘나’를 알지 못해 불안한 사람은 진정한 본인의 문제와 해결책을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타인과 상황에 휘둘리게 되고 점점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친 자신은 본인이 살면서 마땅히 마주해야 할 문제와 책임을 점점 회피하게 되고, 이런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배려심 깊고, 불쌍하고,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려는 나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 싶은 자신을 착해서, 조금 서툴러서, 난 그냥 이런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편하게 단정 짓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이런 주관적 배려심을 인정받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써 분명 내가 나를 불행하게 했음에도 내가 배려심 깊어 스스로 피해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발로 사람을 차서 다치게 했음에도 발이 순간적으로 혼자 반응한 것이고 나는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기적이고 자신에게 무책임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제외한 타인과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모순적이게도 타인에게 이런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타인과 상황으로 끊임없이 상처받고 휘둘리면서도 계속해서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본인 스스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와 스트레스를 주는 것인데, 특히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더욱 큰 상처와 스트레스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자초한 스트레스를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계속 풀게 된다면 시간이 지나 남에게 의존해야만 살 수 있게 됐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끝없는 후회와 절망 속에서 타인과 상황에 대한 증오와 스스로를 불쌍히 생각하는 애처로움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서 ‘나’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행복에 질투하고, 타인의 고통을 즐기고,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만족하게 됩니다. 동시에 본인은 아무것도 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불평만 하고, 사소한 것에 짜증 내고, 오해하고,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인정에 따른 위안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기력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르치려 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처지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자신을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점점 극단적인 생각과 언행을 통해서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시키는 악순환의 삶인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삶인지 가늠이 되시나요? 지금 이 사회를 둘러보면 이 끔찍한 삶들로 인한 문제들이 시시각각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발생되는 대부분의 문제가 서로의 오해와 섣부른 일반화, 극단적인 생각과 언행으로 발생된다는 점에서, 이로 인한 편견, 차별, 오만, 갈등 등은 정도만 다를 뿐 모두가 같은 원인과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방향은 본인이 가고 있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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