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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Sep 27. 2021

역사의 선택을 받은 자본주의

대공황과 냉전을 극복한 역사의 챔피언

  자본주의는 발상지인 영국을 떠나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네덜란드에서 첫 선을 보인 증권거래소와 주식회사, 그리고 영국에서 가장 먼저 체계화한 자본 중심의 대규모 생산 공정은 기존 경제 체제의 성과를 훨씬 뛰어넘는 폭발력을 보여줬다. 융자의 통로가 넓어지면서 경제성이 생겨나는 사업에 과감히 뛰어드는 이들이 나타났고, 리스크를 극복한 이들은 자본가로 도약하면서 귀족이 부럽지 않은 상류층 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가져온 파급력이 세계사를 뒤바꾸었다.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그들이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낼 만큼 성장하자,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점차 확대되며 시민의 참정권이 점진적으로 강화했다. 그리고 생산성을 더욱 향상하여 더 큰 부를 누리고 싶었던 자본가들의 욕망은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강력한 스파크가 되었다. 공업화와 민주주의의 도래가 오늘날 세상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본주의는 현대의 창조주나 다름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역사의 주역 자리를 거저 얻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일생 동안 수많은 암초에 부딪히듯, 자본주의도 몇 번이고 시대적인 도전에 마주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DNA를 보존하기 위해서 진화를 거듭한 인간과 동일한 운명의 길을 걸어왔던 셈이다.




  이윤의 확대에 대한 활발한 토론의 여지를 가로막고 있었던 종교적 불문율이 서서히 그 힘을 잃어가는 동안, 경제학자들은 놀라운 통찰력으로 미개척지였던 경제학을 개발해 나갔다. 그들이 '이기적인 본성의 경제적 주체'인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상정하고, 분업의 장점을 설파하며, 자유무역의 혜택을 이론화한 것은 경제학적인 진리로 자리 잡았다.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규범과 정의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 논리의 손을 잡은 유럽 사회는 시대적 발전을 선도하면서 산업 사회를 이룩했다.


  강력한 물질적 팽창은 더 큰 공장의 건설과 더 강력한 화포의 개량, 더 높은 수준의 학문으로 이어졌다. 확장을 거듭하는 경제 규모와 함께 커지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더 많은 공장이 필요했고, 라이벌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해지자 모두가 부와 무력의 성장에 집중했다. 그리고 더 높은 생산력을 가진 기계와 더 강력한 화기를 제작하는 메커니즘을 고안하기 위해 과학기술 역시 가파른 성장 곡선을 그렸다.


  3박자가 맞물려 끊임없이 성장을 재촉하는 선순환은 장기적으로 꺾이지 않을 무한한 번영을 이루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루어주는 마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열강으로 성장한 유럽의 각국이 서로의 이익을 견제하기 위해 시행한 갖가지 방책이 자본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방해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곡물법, 항해 조례, 대륙 봉쇄령 같은 사건들이 이해관계가 얽혀 자유무역과 국가 단위의 분업이 활성화하는 것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자본주의는 다른 요인을 탓할 여지도 없는 대형 사고를 자초했다. 금융경제의 성장은 중앙은행, 주식회사, 증권거래소를 탄생시키며 더 큰 규모의 경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신용에 균열이 발생했을 때 감당해야 할 데미지가 훨씬 더 커졌기 때문이다. 대공황은 금융에 버블이 생겼을 때 어떤 일까지 벌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충격이 금융경제와 실물경제에 모두 닥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주식에 덧씌워져 있던 신용이 한순간에 벗겨지면서 증권이 휴지조각이 되고, 기업이 산산조각 나며 경제는 엄청난 패닉에 빠졌다. 신용 거래로 이어져 있는 경제의 모든 영역에 대공황의 충격이 전해지며 순식간에 많은 시민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좌절한 사람들과 함께 주저앉은 자본주의는 몇 년 동안 사경을 헤맸다.

  하지만 문명의 새 단계를 열어젖힌 자본주의는 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생각이 없었다. 시장의 자기 조정 능력에 대한 기존의 신뢰를 뒤집고, 필요할 때는 정부가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주장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으로 화답했다. 자본주의가 '수정'이라는 접두사를 붙여 무대 위에 다시 올라선 것이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경제적 파탄을 경험한 자본주의는 시련에 대처할 내공을 쌓았다. 시간이 지나 수정자본주의가 한계를 드러내자, 그는 다시 신자유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난제를 극복했다. 상황에 따라 생존법을 다르게 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유연성을 더한 것이다.


  20세기에 자본주의가 거둔 획기적인 성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금본위제는 팽창하는 경제를 감당하기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었다. 금 보유량이 경제의 성장 속도만큼 늘어나지 않으면, 경제가 커진 만큼 불어난 화폐 수요를 공급이 다 채울 수 없어 필연적으로 디플레이션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경제의 가파른 성장에 몇 번이고 브레이크를 거는 금본위제를 포기했고, 화폐가 금으로부터 독립하는 혁신이 발생했다. 과거처럼 화폐 가치의 원천은 금과 교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정부와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가 된 것이다.


'사회적 합의가 화폐를 만든다'라는 인지혁명의 유산을 이어받은 자본주의는
화폐가 다른 대상에 의존하지 않고도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돈을 파격적으로 진화시킨 것만큼이나 중요한 족적이 곧바로 뒤를 이었다. 바로 한때 자본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던 공산주의를 쓰러뜨린 것이었다.


  소련이 미국과 대립 각을 세우고 공산권 진영 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자본주의가 맞이한 최대의 위협이었다. 인구 대국 중국을 끌어들인 공산주의는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까지 손을 뻗쳤으며,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은 공산주의가 다른 곳으로 전염되지는 않을지 늘 우려하고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공산 진영은 내부 모순으로 자멸의 길을 걸었다. 삶의 목표를 중앙 컨트롤타워가 일일이 지정하는 방식으로는 경제적으로 효율을 낼 수가 없었다. 혁신의 동기가 결여되어 발전의 원동력이 부족한 경제는 전진할 수가 없었고,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중앙 권력은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결국 자본주의는 '역사의 종말'을 선포하며 경제사의 챔피언으로 우뚝 섰다. 인간의 본심을 파악하여 적절히 담아내는 능력, 현실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 도전자를 꺾을 만한 경쟁력을 검증하는 연속된 도전을 모두 극복하고 역사의 주역으로 등극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태어났을 때 세상은 왕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이웃집에서 어린아이가 병으로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지금보다 훨씬 자주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가 정치의 스탠더드이며, 3살 배기 아이들은 희귀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행이 없다면 죽을 확률이 희박하다. 자본주의가 촉진한 더 많은 부에 대한 열망은 여러 세대를 거쳐, 더 많은 이들의 더 나은 삶으로 이어졌다.


  이제 여러 가지 거대한 시련을 딛고 자신의 힘을 입증한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절대다수는 자본주의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지보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다. 지금도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그에 대한 크고 작은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하는 인간의 까다로운 클레임이 아직 길게 줄을 서 있다.


  물론 자본주의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진보를 이끌어 온 경제사의 승자는, 이전보다 여유 있는 태도로 대응해 나갈 것이다. 이미 '문제는 같지만 매년 답이 바뀌는' 현실에 익숙해진 자본주의는, 새로운 문제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 인용문에 Mapo 꽃섬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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