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체지방률 50%를 확인한 건 몇 년 전 인바디 기계에 오른 20살이 되고 1월 초였다. 인바디를 재고 음악 소리에 쿵쿵이는 헬스장 구석에서있었다. 설령 누가 내 결과지를 볼까, 등을 진채 푹고개를 숙였다. 결과지를 보던 20살 여자애 얼굴에는 분명 절망이 있었을 것이다. 몸무게가 정말 심각했고 체지방률은 50%.
더불어 심각한 문제가 또 있었다. 20살의 나는, 여성의 체지방률 오십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 몰랐다는 거다. (역시 무지는 죄다...)
정상 체지방률이 20~25%인데 내가 두 배를 띄었음에도, 내 눈에는 그저 몸무게가 심각했다. 어마어마한 무게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주위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 몸무게는 40kg, 50kg 라고 하니까, 내 몸무게는 실로 어마어마해 보였다. (실제로 그랬다)
20살에 막 대학교에 입학할 신입생 여자애의 몸무게가 이렇다니. 가장 아름다울 나이에 이미 밑바닥을 찍었구나, 하고 20살은 생각했다. 그땐 인바디 결과지를 보면서 왜 내가 체지방률이 오십인지 고민하기보다 그저 못난 나를 자책하기 바빴다. 그게 더 쉬웠고, 나는 너무 어렸으니까. (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여기서 의문이 든다. 왜 나는 체지방률이 50%나 되었을까?
50.....
어릴 적부터의 식습관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가장 큰 요인중 하나는 당연히 부모였다. 우리 집은 그렇게 건강을 챙기는 집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반찬은 주로 고기나 튀김류, 빨간 김치들이었다. 치킨, 피자, 햄버거.. 야식도 자주 먹었다. 인정한다. 우리 부모님은 건강한 식단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신 분들이었다.
거기에 더해 문제가 하나 또 있다. 아빠가 애정표현이 서툴렀다는 것. 왜 그게 문제냐고? 그는 말보다 먹을 것을 사주는 게 편한 사람이었다. 아빠는 어린 나와 동생을 자주 엄하게 대했는데, 그러면서도 항상 미안했는지 우리에게 간식이나 야식을 사주곤 했다. (동생이랑 손들기를 한 뒤로 저린 손으로 열심히 치킨을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엄마도 같이 외출할 때면 라면이나 빵을 사주고는 했고 집에서 돈가스를 만들어 튀겨줬던 기억이 많다.
이렇듯, 나는 김치가 채소인 집에서 자라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내 체지방률 50%가 온전히 엄마 아빠로 인한 것은 아니다. 때문이라 해도 여기서 엄마 아빠 탓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건강한 식단을 이제야 알긴 했지만, 모른 채로 자랐다면 엄마 아빠와 다를 바 없었다.
쨌든 샐러드란 나에게 누구보다 이질적인 존재였고, 그게 밥이 된다는 개념 자체도 없었다.
체지방률 50%의 두 번째 요인으로 '먹는 건 쉽다'였다. 참는 것보다 먹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학생 때의 나는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었다. 애들의 무리 짓기, 기싸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왜 중요해? 하며 서열 싸움에 끼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쓴 걸 보면 멋있어 보이는데, 아니다. 그 결과로 난 '만만한 서열 최하위'가 되었다. 왜 중요한지 몰랐던 결과는 인생의 기반을 흔들었다.(알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다)
12살 땐 그네를 타던 내 머리 위에 남자애가 가래침을 뱉었고, 14살 때는 같은 무리 친구가 나를 때리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쫓아왔고, 15살 때는 왕따였다는 이유로 앞에 앉은 애가 내 정강이를 수업 끝날 때까지 계속 발로 찼다.
스트레스는 쌓였고, 쌓인 건풀어야 했다. 어린 나에 가장 쉬운 건 먹는 것이었다. 그게 제일 쉬웠고, 맛있었고, 충만했다. 배부른 그 느낌은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줬다.
스트레스 대처 기전이 '먹는 것'이 되며 가장 행복한 순간이 먹는 순간이 되고, 잘못된 건 아니었으나 난 선을 넘었다.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하에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어린 순간들이 결국 결과가 되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입학하고 졸업한 이후까지 나는 대략 20kg가 쪘다.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야자를 하며 학교에 있었고, 이후 새벽 1시까지 과외를 받았다. 수험 스트레스에 대인관계 스트레스까지, 여전히 나에게 도피처는 음식과 미디어 밖에 없었다.
매주 토요일이 되면 집에 혼자 남은 나는 보상심리에 가득 차계속되는 허기를 달래기 바빴다.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냉장고 앞에 수십번을 섰고, 먹을 게 없을 땐 초조한 마음으로 부엌 서랍을 뒤졌다. 하루 세끼 먹고도,배가 고파 새벽에 라면을 끓였고, 냉동 대패 삽겹살을 구워 먹었고, 없는 돈을 모아 마트로 향해 과자를 사먹었다. 입이 심심하니까, 아직 배고프니까. 입이 쉬지 않았다.
어느 날은 그런 보상심리가 아주 극심한 날이 있었다.
집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맥도날드를 갔다. 10시 반이면 맥모닝이 끝나니까 흐릿한 정신으로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탔다. 가격이고 뭐고 먹고 싶은 대로 시켰다. 상하이 치킨 버거 라지세트에 감자튀김 라지 두 개를 추가하고, 치킨 너겟 6조각까지. 이 비밀스러운 의식은 나 혼자만 알아야 했다. 설령 아는 사람을 만날까 큰 봉투를 안고 황급히 버스를 타 집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컴퓨터 앞에 전원을 켜고 앉아 큰 쟁반 위로 감자튀김들을 부었다. 수북이 쌓인 감자튀김에서 한 번에 4,5개씩 집어 우악스레 입에 넣고 볼만한 영화를 골랐다. 손에 소금이 묻어있든 말든 마우스를 열심 달칵거렸다. 짭짤한 감자튀김들이 살짝 식어 흐물 해진 채 내 입안에서 섞일 때 묘한 충족감이 올라왔다. 같은 반 애가 추천한 하이틴 영화를 틀고 잘생긴 남주 얼굴을 보며 그걸 다 먹었다. 시각적으로도 미각적으로도 짧은 만족감이 몰려왔다. 더부룩하고, 혀에 짠맛이 너무 심해 얼얼해도. 아깝단 이유로 억지로 감자튀김을 입에 밀어 넣었다.
영화가 끝나자 검은 화면 앞에 놓인 빈 갈색 봉투와 라지 사이즈의 빨간 각 세 개, 비어있는 큰 철 쟁반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빈 용기들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방금까지는 가득 차 있던 곳이 순식간에 비어졌다.
충만함은 더부룩했고, 가슴께에는 허망함이 가득 차 다시 묘한 허기가 올라온다.
분명한 폭식이었다.
어린 마음에 불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으나 무시했다. 알았다. 이렇게까지 먹어대는 건 정상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먹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먹는 건 여전히 너무 쉬웠으니까.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무언가를 먹었으리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며 여러번의 다이어트와 요요를 겪었다.
꺾여도 그냥 하는 용기 44p.
헤더턴과 바우마이스터는 이것을 '자기로부터의 도피'라고 설명했는데, 우리는 부정적인 정서를 느끼고 있을 때 음식이라는 외부 자극에 민감해지고, 음식을 먹으면 자존감과 자기조절 같은 복잡한 문제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는 음식에만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살의 나부터, 바로 어제까지의 나를 되짚었다.
체지방률 50퍼센트라는 그 숫자는 내 어린 날의 울분과 우울, 보상심리들에 탄생한 결과물이지 않을까. 나로부터, 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결과물이지 않을까.
20살의 난 그것도 모르고 나를 질책했고 깎아내렸다.성인인 나는미성년자였던 나보다 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까지 더 해 스스로를 질책했다. 도피하고 자극외의 것들에 둔감해지며 누구든 겪어야만 알 수 있는 힘든 시기가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