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행위는 마음의 행위
꺾여도 그냥 하는 용기 42p.
먹은 것이 많아질수록 숨이 가빠오지만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아, 오늘도 중간에 멈출 수 없겠구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냄비에 물을 더 부었다. 엄마가 숨겨둔 라면 두 봉지를 한꺼번에 까서 끓였다. 라면까지 먹고 나서도 허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었다. 남은 밥이 없었다. 밥도, 반찬도, 라면도, 과자도 빵도 모두 해치우듯 먹어버린 탓에 남은 게 없었다. 정말 더 먹을 것이 없을까 하고 잠시 숨을 고르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쯤 눈이 뒤집혀 먹을 것을 찾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엄마가 버리려고 비닐봉지에 묶어둔 곰팡이가 핀 빵과 상한 과일이었다.
안돼. 그러지마. 배고픈 게 문제가 아니야.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버리지마.
아무리 혼잣말을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몸은 머리를 따라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나는 비닐봉지를 풀고 곰팡이가 핀 빵을 우걱우걱 입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는 밤,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품격은 내팽겨쳐 버린 채 음식에 대한 갈망만이 남은 한마리의 아귀가 되었을 뿐이다.
114p. 나는 맞을 만해서 맞는 사람이었다. 손톱을 뜯고, 돈을 허투루 쓰고, 내 친구들에게 그를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다니니까. 그의 체벌은 정당했다. 모자란 날 데리고 다녀주는 그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35p. 오전 7시부터 밤 9시. 화장실은 웬만하면 다섯 번 이하로. 식사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대가'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 사생활이란 건 없었다. 최대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물을 마시는 양도, 화장실에 가는 횟수도 최소한으로 정해져 있었다.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실험의 실험용 쥐처럼.
58p. 약이 떨어지면 나는 자존심을 굽히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엄마의 대답은 매번 같았다.
의지로 이겨낼 수 없냐는 것이었다. 나는 돌아버릴 것 같은데, 아니 이미 돌아버린 것 같은데 의지의 문제로 치부하는 엄마의 대답에 나는 의지로 이겨낼 수 있었으면 약은 왜 먹고 전화는 왜 했겠냐며 폭발적으로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그러나 여간한 신경질에는 부모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183p.
"예헌씨는 차로 비유하자면 6년 내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잠깐 일반 도로로 빠져나왔는데, 아무것도 점검할 시간조차 가지지 않고 아우토반으로 뛰어든 거나 마찬가지 인거에요. 그건 사실 자기 학대에요. 사람도, 자차도 쉴 새 없이 달리기만 하면 고장이 날 수밖에 없어요. 다시 달리기 위해서는 점검하는 시간이 꼭 필요해요"
내 마음이 평안한 곳에는 부드러운 3월의 봄바람과 피어나는 꽃망울, 그리고 따뜻한 햇살이 있었다. 매출을 내라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오는 카톡도, 출근 보고도, 청소 보고도 없었다. 부당한 노동착취를 하는 회사로부터 잠시 벗어나 걷는 것만으로 나는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왜 봄이 오는 것도 모른채 이 겨울을 지났을까. 무엇을 얻기 위해 햇살을 받으며 잠깐 걷는 것조차 어색해 질 지경으로 나를 몰아넣었을까. 내 마음대로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질 수 있는 나를, 무엇 때문에 스스로 그리도 고통스럽게 만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