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먹고 살기 프로젝트
그만 그려야지 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실컷 그리고 싶어!
어버이날, 엄마의 얼굴을 그린 색연필 인물화를 선물로 드렸다. 4월의 끝자락, 아이디어스(idus)를 통해 제법 주문이 들어왔는데, 어버이날 선물을 미리 준비하는 듯 대부분은 부모님을 그려달라고 했다. 엄마는 인물화 작가 활동을 시작하게 된 나를 가장 먼저 축하해주시고, 진심으로 기뻐해 주셨는데, 아직 엄마를 그린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버이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선물을 드리니, 자연스럽게 그림이야기가 나왔고, 너는 어렸을 때에도 늘 마른 나뭇가지를 찾아내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고, 언젠가 그림 관련 일을 할 거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초등학생 때 공책과 교과서 사이사이 공백에는 이런저런 연필그림으로 빼곡했고, 만화가 한승원의 '우정 이상 사랑 이하'라는 만화책을 계기로 만화의 세계로 진입했다. 공부와는 달리 그림에 대해서는 유독 승부욕이 불탔다. 미술학원을 다닌 친구의 밀도감 넘치고, 입체감까지 표현한 그림을 보면, 부러움을 넘어 시기와 질투를 강하게 느꼈다. 어른이 될수록 세상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넘쳐난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 정도는 그림을 좋아하긴 하지만, 재능은 없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그 후 가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가 그나마 그림이 들어설 마음의 공간을 채워버렸다. 당장의 수입이 절실해진 현실은 취업을 선택하게 했고, 이번 삶에서 그림은 주연은 커녕 대사 한마디 없는 조연도 차지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림을 향한 그리움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긴 세월 켠켠히 쌓어 단단하고, 진득하게 농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찾아왔다. 마치 물에 타 마시는 농축 과즙 주스처럼, 나의 붉은 피에 흡수되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는 도저히 그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7시 통근버스를 타면 출근 전까지 40분, 점심을 김밥으로 해결하면 40분이 생겼다. 그동안 그림을 그렸지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몇 시간 남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그림만 그렸으면’, ‘이제 그만 그려야지 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그릴 수 있었으면, ‘유화나 아크릴화도 재밌어 보이는데, 정말 배우고 싶다.’, ‘그림연습을 더 많이 하면 지금보다 잘 그릴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들이 발목을 잡아 걸음을 떼지 못하게 붙들었다. 해소되지 않은 아련한 그리움은 서러움으로 변해갔다. 지금처럼 누리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싶은 만큼 실컷 그리는 삶을 살고 싶었다.
어렵게 남편에게 마음을 고백했고, 그즈음 받은 인스타그램 DM(1:1 대화)에서 아이디어스(idus:핸드메이드 제품 판매 온라인 플랫폼)를 알게 되었다. 3주 만에 첫 주문을 받았고, 한 달 동안 총 24건의 그림 주문이 들어왔다. 수수료를 포함하여 60만 원의 매출이 일어난 것이다. 입점 후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작은 가능성이 보였다.
양쪽 집안 모두 가난했지만 운 좋게 남편은 대기업, 나는 공공기관에 취업했고, 맞벌이 15년 차가 되었다. 다행히 부동산 상승기에 집을 갖고 있었기에 중산층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연금을 고려하면 추가 소득이 없더라도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림만으로 생계유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때가 되었다’, ‘알맞게 무르익었다’, ‘매우 적절한 시기이다’, ‘지금 이 순간이다’ 이 모든 표현이 지금의 나를 향하고 있었다.
하루 중 10시간 이상을 회사에 저당 잡힌 채 15년을 살아왔다. 그림을 향한 그리움은 감출 수도, 단념할 수도 없어 때가 되어 매우 적절한 이 시기에 좋아하는 그림만으로 생계를 유지해 보라고 재촉했다. 그것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과 함께 초등학교 3학년 외동아들을 주양육자인 내가 곁에서 항상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이 곧 작업실이기에 아이의 작은 소리에도 당장 달려갈 수 있고, 갑자기 쏟아진 비라도 언제든 우산을 건넬 수 있다. 따뜻하고, 신선한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줄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언제든 그것들을 해 줄 수 있다. 늘 곁에서 넘치는 사랑을 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기에 정년을 보장받는 그곳을 떠나는 아쉬움과, 후회, 미련 따위는 유유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