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으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하던 최연희 씨와 그녀의 아들이 이제는 행복하게 살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석 달 만에 온 연락은 믿지 못할 최연희 씨의 부고였다. 드라마의 소재가 된 그 사건이다. 영정 속에서 여전히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이제는 우리와 함께 숨 쉬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최연희 씨가 우리를 만나기 이년 전쯤 만취한 한 남자가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가 큰소리로 위급함을 알렸다. 경찰에 신고도 하였고, 그 덕분에 맞고 있던 사람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큰 부상의 피해자는 곧 사망했다
연희 씨는 경찰에서 목격자 증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경찰의 요청으로 재판에서도 증언하였다고 한다. 그 폭행범은 만취한 상태와 초범인 점을 인정받아 감경되어 2년 징역을 최종 선고받았다.
2년 후, 그가 출소했다. 그리고 길을 가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가는 연희 씨를 우연히 보았다. 그날 이후 그는 연희 씨의 주변을 맴돌았다. 연희 씨의 우체통에서 우편물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 남자는 학원 차에서 내리는 연희 씨의 아들에게 말을 걸고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아들이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었다는 말이 찜찜하던 차, 그 남자와 연희 씨는 길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그가 연희 씨에게 다가와 잘 사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저 아저씨가 지난번에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녀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웠다.
그날의 이야기를 들었던 연희 씨의 친구는 그녀의 영정사진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괜찮다고 별일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후회된다고 하였다.
연희 씨가 신고하고 법정 증언했던 사람이다. 증언하여 징역형이 선고된 폭행범이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와 친정에 며칠 피신했다. 결정적 증언을 한 증인을 보호하는 것은 드라마 속에서만 있지 우리의 현실에는 없는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이혼 과정에서 그동안 남편의 폭행이 얼마나 심했는지 가족들도 알게 되었다. 연희 씨의 친정 가족은 그동안의 어려움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가족관계가 회복되었던 터라, 친정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길어지는 친정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집에 간 날 밤. 그녀는 아이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도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으나, 경찰은 우편물 없어지고 길에서 마주친 정황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며 그녀를 돌려보낸 날이었다.
남편과 내가 함께 발품 팔아 구해준 집에서, 함께 집들이하며 행복만 가득하길 바랐던 그 집에서, 그녀는 홀로 남을 아들 생각에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되짚어 써 내려가는 이 순간 마음이 먹먹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종종 후회했다. 조금 더 자주 살펴볼걸. 아니 그때 바로 분가하지 않도록 할걸. 조금만 더 같이 살걸. 그런 후회들이 마음을 휘감았다.
그녀를 잃고 나서도 내게는 긴급한 피난이나 보호가 필요한 가족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발달장애인이 잠깐잠깐씩 머무를 곳이 필요한 일이 생겼고, 그럴 때마다 사랑누리에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장애인 공동생활가정의 설치 목적을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법이란 것은 효율을 위해 선을 그어 놓는 것이니까 지켜야 한다.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어머니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다.
“선생님, 성권이 아빠가 사고가 났어요.”
“아버님 많이 안 다치셨어요?”
그 어머니는 내가 건네는 이야기를 건네받아 급히 이야기했다.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을 넘어 절망감도 느껴졌다.
“안성 근처 고속도로에서 큰 사고가 났어요. 당장 수술하러 가야 하는데, 치료도 며칠 걸릴 거라고 하고, 생사를 오가는 정도래요. 어떻게 하죠? 지금 당장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장 병원으로 가보셔야지요. 아드님 걱정에 못 가고 있지요?”
“네.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펴 주세요. 친척들이 장애가 없는 작은애는 돌봐주겠다고 하는데, 장애가 있는 큰애는 다들 꺼려요.”
“어머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제가 잘 돌보고 있을게요. 성권 씨도 사랑누리에 자주 놀러 와서 많이 불편해하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말을 건네며, 복약 주의사항과 몇 가지 안내 사항을 받아 적었다. 성권 씨는 심한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감각이 예민한 편이어서 가끔 감각자극이 심할 때,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평범한 소리가 몇백은 크게 들려 고통스럽거나, 전자음이 들리면 귀를 막고 방방 뛰며 소리를 지를 때가 있었다. 이러한 행동을 친척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폐성 장애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어도 아이를 잘못 키우는 엄마 취급이 일수였다고 성권 씨 어머니는 일전에 내게 이야기했었다.
며칠 후, 성권 씨의 어머니가 연락이 왔다. 성권 씨 아버님은 수술이 잘 되어 퇴원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이라며 고마움을 전해왔다. 그리고 수술을 앞둔 다른 어머니의 사연을 내게 전했다. 유방암을 선고받고 수술을 앞둔 어떤 어머니의 자녀가 심한 지적장애라고 하였다. 언어적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아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돕고 싶었다. 그런데 내게는 큰 장벽이 있었다. 내가 운영하는 시설은 장애인 단기 보호센터가 아니라, 장애인 공동생활가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연의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많이 만났다. 결혼 20년 만에 계 모임에서 부부 동반 여행을 가는데, 발달장애 자녀 걱정되어 못 간다는 이야기.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눈물로 상을 치르는데, 장례 3일 동안 장애가 있는 아이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 우리가 살아가는 애경사 속에서 그리고 그저 평범한 삶의 행복을 한 조각 누려보고 싶은 발달장애인의 가족들이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발달장애가 있는 내 아이를 잠시 맡겨둘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장애인 단기 보호센터가 필요합니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이야기와 소원들이 장애인 단기보호센터 건립을 간절히 원했다. 기관 설립 3년 차인 내게는 너무나 무모한 일. 우리의 재정 형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연희 씨와의 인연에서 지켜주지 못한 후회와 성권 씨의 가족들을 지원하면서 만난 회복의 기쁨과 우리의 도움이 절실한 발달장애 가족들의 외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