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게 지내던 선배 H가 있다.
그녀는 검소하고 배려심이 많아서 늘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유익한 모든 걸 나누며 사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고개를 옆으로 떨구며 한숨 나오게 하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며 불만인 사람이 있다. 바로 그녀의 남편이다. 그녀 역시 젊은 나이에 이민 와서 열심히 살다 보니 허리에 느껴지는 잦은 통증을 그러려니 하며 지내다가 그녀의 나이 60세가 넘어가면서 점점 심해지는 통증을 돌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일한 취미가 골프였는데 의사가 골프를 치지 말라는 말에 골프를 다시 치기 위해 열심히 치료했다.
누군가 잘한다고 말하면 그 병원으로, 한의원에서 침도 맞고 치료를 열심히 한 탓인지 골프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 그녀와 골프를 칠 때면 남편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자주 쏟아냈다.
예를 들면 허리 통증이 심해지면 걷기도 힘들었던 그녀는 남편에게 집안 청소를 부탁하면 나중에 더 아프면 해준다며 집안일은 소가 닭을 보는 상태를 넘어서 더 심한 표현을 찾아야 했다.
그녀의 남편은 평생 자신의 건강관리를 잘해서 군살도 없고 매일 18홀을 버기( buggy)를 끌고 골프를 치며 아주 건강한 편이다. 가끔 식사 준비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날 가장 손쉬운 끼니가 라면 아닌가! 그 흔한 라면, 국수 등 밀가루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는 그녀의 남편. 육식은 하루도 빠짐없이 먹어야 하므로 냉동실에는 여유분의 고기들이 늘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식사는 개인의 취향이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허리 통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청소나 식사 등 집안일을 맡아서 해야 함이 당연하지 않을까! 듣고 있던 나도 좀 심한 남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남편이 더 나이 들어 몸이 불편해지면 요양원에 입원시키거나 원하는 음식을 해주지 않을 거라며 그 시간을 상상하는지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드라이버 거리가 엄청나게 나왔다.
그녀는 그렇게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를 마음속에 쌓아가며 언젠가 한꺼번에 쏟아낼 날을 기다리며 지내는 듯했다.
한국에 다녀와서 골드코스트에 갔다가 그녀의 집에 들렀다.
여러 번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부르자 남편이 나오며 문을 열어주었다. H를 찾았더니 소식을 듣지 못했냐며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볼 때보다 훨씬 여위고 주름이 많아진 모습이었다. 허리 통증에 비만이 좋지 않다는 의사의 말에 다이어트를 심하게 했던 H. 그 과정에서 면역력이 떨어진 상황에 갑자기 찾아온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 그녀는 입원했고 여러 방법으로 검사했고 치료했지만, 열이 떨어지지 않았고 지속되는 항생제 투여로 패혈증이 점점 심해져 결국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는 소식이었다.
내 귀로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고 허리가 좋아지고 난 후부터 그녀는 정말 건강한 편이었다.
그동안 함께 했던 많은 말들, 다음으로 미뤘던 마음의 상처들을 당사자에게는 표현하지도 못한 채 그녀만 먼 길을 떠났다. 나 역시 그녀의 부재가 오랫동안 믿어지지 않아서 남은 가족의 상실과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 안타깝기만 했다. 그녀는 남편과 다툼이 있을 때 가끔 그녀의 딸 집에서 며칠씩 지내다 오곤 했는데 장례를 치른 이후 그 딸도 자신의 아빠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며 "엄마의 죽음에 아빠가 가장 큰 원인제공을 한 거야. 나도 아빠를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야."라고 했다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많은 아내나 엄마들이 "내가 참아야 집안이 조용하지. "하며 덮어두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고 나의 주변 친구나 지인들을 보아도 그런 경우가 많다.
좋은 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려고 하면 많은 사람이 화가 섞여서 싸우는 것처럼 들리는 경우가 많다. 참는다는 것, 다음으로 미룬다는 것, 마음속 깊이 묻어 둔다는 것 등이 결국에는 화나 분노로 폭발하는 재료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일단 쌓아둔 분노, 숨겨두었던 요구, 덮어 두었던 마음을 꺼내보자.
상대방에게 직접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이 편한 장소를 선택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자. 강가나 바닷가, 차 안도 좋고 노래방, 집에 혼자 있을 때 등 마음속을 다 뒤집어서 쏟아내 보자. 그런 다음에 목소리에 분노와 힘이 빠지면 당사자에게 편하게 대화를 시도해 보자. 이렇게 해서 나의 내담자도 가족과의 관계가 원활해진 사람들이 여러 명 있다. 나 역시 평소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에는 나의 피곤함을 가족에게 표현하고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하고 있다. 늘 나를 양보시켰던 나에게 커다란 변화이자 나 스스로 나를 보호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이렇게 했으면 행복하겠어. 당신은 나의 어떤 점을 고쳤으면 좋겠어?" 이렇게 멋진 말들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연습하자. 그래서 다음, 나중으로 미루면서 마음속에 폭탄의 재료를 쌓지 말고 버리면서 살자.
그래도 어느 날 폭탄재료가 생긴다. 그럴 때면 나만의 장소로 간다. 어떤 날은 목이 아프도록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욕도 한다. 사람별로 만들어 놓은 인형을 때리기도 한다. 이 분노는 아주 먼 과거로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억압에서 왔음을 알아차린다. 다 버리고 달래고 나온 나의 얼굴은 뽀얗고 예쁘다.
한 줄 요약: 오늘 말하자. 의문이 생긴 즉시 묻고 들어보자.
ps: 항상 대화를 잘하며 지내는 많은 사람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