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리액션 장인의 길
말재주가 없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경청'이라는 말이다.
(말재주가 없으니 듣는 거라도 잘한다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상 되돌아보면 나의 어릴 적(80년대)만 해도 경청이란 것은 그렇게 중요하게 강조되던 덕목이 아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웅변학원이란 것이 있고 학교에는 웅변대회가 있어서 '이 연사 큰소리로 외칩니다~~' 하고 학생들이 나와서 발표할 정도로 발표능력을 크게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소심하거나 말주변이 없는 이들은 주위 어른들로부터 자신감이 없다고 잔소리를 듣곤 했었다.
물론 그 사실만 가지고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뒷받침할 수는 없지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무언가 더 인정받는 분위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지금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채용 면접에 있어서도 구두 면접으로 진행하다 보니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로 표현하는 지원자가 조금 더 유리하긴 하다. 그만큼 말을 잘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또,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능력임에는 틀림없다.
반대로 경청은 어떠한가.
'나의 특기는 경청입니다.'라고 했을 때 듣는 이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애초에 남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이 어떤 개인의 역량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그것은 또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대는 말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듣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 조직, 인간관계에서의 덕목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그 이유를 명확히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IT가 발달하고 관계(커뮤니티)의 범위와 규모가 엄청나게 확대되면서
특히 인간관계만이 아닌 조직에서의 '소통'이 점점 중요해지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막연하게 추측해 본다.
즉, 폐쇄적이고 소규모이던 소통창구가 엄청나게 확대되고 늘어나면서 각 개인간, 집단간, 조직간 소통이 활발해지고 또한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소통을 통한 계층간 공감대 형성의 중요성도 커진 것이라고 말이다.
아무튼 중요해진 만큼, 실상 경청하는 것은 어렵다. 말 그대로 그냥 듣고만 있는 것도 어렵다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때로는 관심이 1도 없을 이야기들을 아무런 대꾸 없이 들어주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실제로 2명 이상이 약간 심도 깊은 대화를 하는 것을 보면 상대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중간에서 말을 끊거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뜻일 거다. (한국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되는데)
아니면 상대방이 말이 끝내기 전에 내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참지 못하거나. 때로는 까먹을까 두려워 빨리 뱉어버리고 싶다거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온전하게 한 사람의 말이 끝나도록 기다려주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 같긴 하다. 간혹 걸려오는 스팸전화처럼 끊지 못하게 끝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경우가 아닌 이상말이다.
결국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경청에는 말하고픈 욕구를 참을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상대방의 감정선을 읽어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경청은 상대방이 대화에 집중하고 진정성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이끌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경청하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대화의 질을 높이는지 알 수가 있다.
한편 경청이란 결국 단순히 듣는 것처럼 보일 뿐이니 듣는 것 자체로는 특출나보이지 않을 수 있다.
특히나 나처럼 말재주가 없는 사람은 평소 입이 무거워서 듣는 것을 위주로 대화하는데,
그러다 보면 보통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디 가서든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물론 가끔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떠들어 댈 때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진정한 경청은 듣는 것만이 아니다.
나아가 경청이 중요한 것은 소통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결과물인 '공감'의 기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성 측면에서 결국 우리는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되는 존재이며
필연적으로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공감을 얻으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상호간 공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수시로 소통(말하고 듣는 것)을 하고
소통의 질을 높이기 위해 우리는 듣는 것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하게 된다.
경청에서 한걸음 나아가 공감이라는 목표에 다다랐지만 사실 공감은 또 다른 난해한 작업이다.
내가 생각하는 공감은 상대방의 이야기에 영혼 없는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그 감정까지 공유하는 것이다.
즉, 감정의 공유와 이해(理解)가 핵심이라 생각하며 여기에서 곧잘 충돌하는 것이 나의 사적인 감정과 이해(利害)관계이다. 실제로 감정적으로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공감을 해줄 수 없을 때도 더러 있다.
비즈니스적인 상황에서 공감이 어려운 것은 개인적인 감정이 상충될 때도 있지만 대다수는 이해관계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제 의견은 반대입니다.'라는 것은 사회에서 흔한 일이다.
경청. 공감. 소통.
현대 사회에 있어 특히 관계적인 면에서 너무나 중요하고 좋은 말들이다.
그만큼 수없이, 귀에 못이박힐 정도로 많이 들은 단어들이다.
하지만 솔직 담백한 말 한마디 하기 쉽지 않은 각박한 현실에서
매번 경청하고 공감해 주는 소통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흔히 60세라는 나이를 이순(耳順)이라고도 표현한다고 한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귀가 순해진다는 의미인데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feat 네이버 지식백과)
그런데 어느새 40대가 된 나를 되돌아보니 나이를 먹어갈수록 오히려 고집과 자기주장만 강해지고
남들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나의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라도, 비록 모든 대화에 있어 경청과 공감은 못하더라도
조금은 나의 사사로운 감정을 조금 내려놓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또 객관적인 입장에서 듣고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철없는 40대보다 곱게 늙어가는 미래의 나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