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담 Jun 03. 2021

프롤로그: 아침밥 준비는 전략게임이다.

맞벌이 아빠에게 아침밥 짓기 게임을 추천한다.

지금부터 쓸 이야기는 라면 밖에 끓일줄 모르던 용자의 아침밥 짓기 게임 레벨업 경험담이다. 물론 아직도 레벨은 낮고 갈 길은 멀다.


#아침밥을 해먹으면 자존감이 올라간다.


아침밥을 먹으면 즐겁다. 주말 아침이면 더 좋겠지만, 평일에도 10분만 시간을 내서 아침밥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그 일상적이고 소소한 행위만으로도 자존감이 오른다. 오늘 하루의 시작도 꽤 괜찮다는 충만한 기분을 만들어준다. 배가 고프면 기분이 나빠지고, 기분이 나쁠 땐 뭘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짝궁과 함께하면 금상첨화다. 아침에 잠시나마 마누라와 눈을 마주하고 함께 밥먹는 시간을 가지면 외롭지 않다. 오늘 하루도 같이 견뎌낼 동지애가 느껴진다. 그 아침밥을 내가 준비한다면, 나와 누군가의 충만한 하루를 시작시켰다는 작은 성취가 자존감으로까지 이어진다. 가정의 평화와 마누라의 사랑은 덤이다.


높아진 자존감으로 아침을 시작하면 하루가 달라진다. 출근길 버스기사의 난폭한 운전도, 팀장의 똥 씹은 표정도,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업무도 별 일 아니게 느껴진다. 괜찮은 나의 오늘에 집중하면서 적당한 거리감이 생겨난 덕이다. 거리를 두고 보면 어느 것이든 그럭저럭 괜찮은 일상의 한 조각일 뿐이다. 멸망하는 지구도 스크린 밖에서 보면 아름답기까지 한 것처럼, 아침밥 준비라는 소소한 행위가 나를 스크린 밖으로 꺼내준다. 아침부터 뇌에 당분이 공급되니 일도 더 잘된다. '미라클 모닝'의 완성이다.


물론 아침을 해먹는 것은 귀찮다. 분 단위로 시계를 보는 출근시간을 쪼개 아침까지 해먹기는 어렵다. 솔직히 라면 밖에 끓일 줄 모른다면 누가 해주지 않으면 안 먹는게 아침밥이다. 다이어트라는 365일짜리 핑계도 있다. 남이 해주는 아침밥은 엄마와 같이 사는 사람의 특권이고, 호캉스(호텔에서 보내는 바캉스) 때나 누려야 할 호사다. 마누라에게 요구했다간 그 날로 '남편새끼' 혹은 '한남'으로 등극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내가 해야 한다.


#집밥 만들기는 쿨한 취미다.


인스타에 올릴 요리도 아니고 매일매일 집밥을 만드는 일은 유명 쉐프처럼 멋진 ‘요섹남’이 아니라 어쩐지 ‘백주부’에 가까운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도무지 쿨하지도 않고 재미마저 없다. 그러나 이는 요리를 본격적으로 해보지 않은 자의 편견이고 오해다. 


어릴 적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겨 했다. 턴 방식이라 아군들이 한 번씩 공격하고 나면 다음 턴에 적들이 공격하는 식이다. 방어력이 약한 마법사와 궁수를 뒤로 배치하고, 적 마법사의 공격범위를 고려해 전사들을 전진시켜야 한다. 모든 아군 유닛들을 적절히 활용해 최적의 한 턴을 완성될 때까지 몇 번이고 세이브와 로드를 반복했다. 사실 인생의 많은 부분이 전략게임적 요소가 있다. 시험 대비는 각 시험과목별 분량을 고려해 정해진 일정까지 확실히 끝낼 수 있는 공부량을 적절히 배치해야 한다. 절대 무리하게 볼 자료를 늘려서는 안된다. 마감이 있는 보고서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마감을 맞추는 범위 내에서 최적의 결과를 내도록 각 조사와 작성 시간을 짜야 한다. 그렇게 주어진 조건 내에서 완벽하게 짜맞춰 결과를 냈을 때의 짜릿한 쾌감은 전략게임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질럿과 드라군의 이동속도를 고려하듯 식재료의 특성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돌봄 노동처럼 느껴졌던 요리도 해보니 전략게임이었다. 스타크래프트에서 질럿과 드라군의 이동 속도와 특성을 고려해 전투를 지휘하듯, 요리도 각기 다른 조리 시간과 신선도 유지 시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준비해야 한다. 예컨대 토스트와 사과를 준비할 때는 토스트가 굽히는 시간을 생각해 토스터기를 먼저 누르고, 이후 사과를 썰어내서 토스트와 사과가 동시에 식탁에 나오도록 시간을 짜야 한다. 토스트는 미리 구워 내면 금방 눅눅해지고, 사과도 미리 썰어 두면 금새 노래져서 미학적으로는 물론 식감마저 떨어지기 때문이다. 요리에 익숙한 사람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인터넷이나 방송의 요리 설명 어디에도 여러 음식의 시작과 마무리 순서를 알려주는 곳은 없다. 전략게임을 수행하듯 간단한 아침밥 준비를 시작해보자. 자존감이 상승하고 업무능률도 오른다. 매일 아침 마누라와 마주 앉아 잠시간의 동지애를 느끼면 더없이 충만한 하루가 시작된다. 가정의 평화와 마누라의 사랑까지 얻을 수 있다.


이제, 아침밥을 준비해보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