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익는 중입니다

by 지은담

“오늘 서울의 낮 최고 기온이 37.8도까지 오르면서 역대 7월 상순 최고 기온을 기록했고요. 광명은 40도를...”

팔이 지글지글 익는 듯해 눈을 떴습니다.

뉴스를 검색하니 폭염 속보가 흘러나왔습니다.

오전 7시, 새벽 3시 넘어 잠에 들었지만 살인적인 햇살 테러로 잠을 포기하고 일어났습니다.

이른 장마가 온 듯 만 듯 지나고 7월이지만 8월 한여름 무더위가 기승입니다.

폭염으로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요.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기상이변은 더 이상 뉴스 속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우산 갖고 가”

“맑은데 무슨 우산?”

“요즘엔 남자들도 거리에서 우산 많이들 쓰더만, 햇살이 보통 뜨거워야 말이지.”

“남자가 무슨 우산을 써, 모양 빠지게. 남자는 폼이지~”

호기롭게 집을 나서더니, 퇴근하자마자 에어컨 리모컨부터 찾습니다.

출근길, 그 당당하던 폼은 어디 가고 뜨거운 하루에 데쳐진 채 바닥에 납작 드러눕고 맙니다.

젊은 날엔, 한여름만 오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지요.

가슴까지 뜨거워지던 계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무더위 앞에서 내가 먼저 한 걸음 물러섭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자연에 맞서기보다는 타협과 겸손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하긴 요즘 같은 이상 폭염은 젊은이들의 바캉스 문화도 바꿔 놓았지요.

뜨거운 태양에 맞서 뛰노는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실내에서 여유를 즐기는 호캉스, 살갗을 태우던 물놀이보다 고요함을 찾는 풀캉스, 그리고 열대야를 피해 홀로 야간여행을 떠나는 혼캉스가 대세입니다. 이제는 노는 여름보다 회복하는 여름, 힐링과 사색의 계절로 달라졌습니다.


장마가 물러가고 본격적인 무더위 시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조급함 대신 버티는 기술을 시전 할 때입니다. 더위 앞에 짜증내기 보다, 묵묵히 버티는 내면의 깡이 절실해지는 계절이지요.

하지만 단순한 인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요령이 필요하죠. 내공이 얕으면 쉽게 달아오르고 폭주하기 마련입니다.


여름은 마음을 단련하는 삶의 도장(道場)입니다. 뜨거운 햇살과 불쾌한 습도, 거슬리는 해충과 쏟아지는 피로까지, 이 모든 자극은 내공을 길러주는 살아 있는 수련장입니다.

그렇게 뜨거운 일상 속에서 열정을 불사르다 보면, 때때로 과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요. 뇌관에 불이 붙을 즈음, 자연은 절묘한 타이밍에 시원한 소나기를 내려줄 테니까요. 그러니 믿고 가 봅시다.


가끔은 그 옛날, 불편함마저 낭만이던 여름밤이 그립습니다. 마당 평상에 누워 별을 바라보던 그 시간, 어머니의 부채질은 한밤중에도 멈추지 않았지요.

시간이 흘러 마당이 사라지자, 여름밤의 낭만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여름은 어느새 무기력한 계절이 되어버렸고, 그저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며 가을을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그 여름이 내 안의 무언가를 익히고 있었다는 걸요. 이 뜨거움은 폭풍처럼 자라는 ‘나’라는 나무가 잠시 숨을 고르며 열매를 익힐 수 있도록, 자연이 내게 허락한 시간이었음을요. 가지를 뻗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익어가는 법을 배워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편리함 속에서 별만 찾지 말고 나만의 별빛을 뿜어내야 합니다. 어릴 적 어머니의 부채바람처럼, 누군가의 쉼이 되는 바람을 만들어내야 할 때입니다.


무더위를 견디며 오늘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가을날, 나도 모르게 영롱한 빛과 향기로 무르익어 있을 테니까요. 그때쯤이면 알게 될 겁니다. 이 여름이, 나를 키웠다는 걸.


하지만 여름의 의미를 모른다면요?

뜨거운 현실을 외면한 채 무기력하게 눕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국 냄비 속 개구리가 되고 말 겁니다.


지금 세상은 분명 끓고 있습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냄비 밖으로 도망쳤고, 어떤 이들은 뜨겁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안온함에 젖어 서서히 익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혹시 나도 그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냄비 속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 주위 환경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 삶의 온도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혼을 놓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살아나야 할 때입니다.


여름이 깊어질수록 폭주하거나 낙과하는 열매들이 늘어납니다.

하지만 자연은 그런 낙과들조차 허투루 쓰지 않지요.

떨어진 열매는 미련 없이 땅에 스며들어 남은 열매들에게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줍니다.

폭주하든, 떨어지든, 실한 열매가 되든 그 모든 모습이 결국 나일 수 있습니다.

어떤 열매가 될지를 선택하는 건 나 자신이니까요. 그러니 선택과 책임은 언제나 내 몫입니다.

이렇듯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감사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여름의 시름이 깊을수록, 가을의 단내는 더욱 짙어집니다. 그러니 오늘을 진하게 살아냅시다.


어쩌면 가을은 이미, 우리 안에서 조용히 익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은, 묵묵히 익어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봅시다.

“좋아, 충분히 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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