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예찬

태권도, 내 삶의 반려 운동이 되다

by 지은담
무너졌던 나를 다시 걷게 만든 작은 시작

태. 권. 도!

기합 소리와 함께 흙먼지 날리던 운동장. 배고픔도 잊은 채, 전교생이 함께 태권도 수련에 몰두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움직이던 그 시절, 시골 학교 운동장은 태권도의 기상으로 가득했습니다.


국민학교 2~3학년쯤이었을까요?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은 작은 국기원으로 변했고, 사범님의 호령에 맞춰 아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운동장은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고, 아이들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주먹을 뻗고 발차기로 공기를 갈랐지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감이 생기고, 왠지 모를 의협심도 솟아나곤 했습니다. 계속 수련해 단증까지 땄더라면 좋았으련만, 태극 2장을 배우고 난 뒤 수업이 종료되어 아쉬움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그 무렵 TV에서는 ‘로봇 태권 V’와 ‘태권 동자 마루치 아라치’ 같은 만화영화가 방영되었고, 이는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들 만화는 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고, 자연스레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극기의 태도를 심어주었습니다. 해 질 녘이면 시끌벅적하던 골목길도 만화가 시작되는 시간이 되면 금세 조용해졌지요.


그렇게 태권도는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전국에 새마을운동이 전개되고, 학교마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그 시절, 태권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 시대의 열망 속에서 공동체 정신과 강인한 기상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교육과 문화의 맥락 안에서 태권도 역시 분명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던 셈입니다.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베이비부머와 X세대. 그 강인함의 바탕엔 태권도 수련과 국민교육을 통해 다져진 정신의 근육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기합 소리로 기상을 일깨우고, 교육헌장을 통해 정신을 무장했던 시절. 돌아보면 참 대단한 국민 기초 체력 훈련(!)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웬만한 풍파에도 끄떡없는 강철 멘털과 끝까지 해내는 무한 끈기가 자연스레 탑재되지 않았을까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장은 어쩌면 그 시절의 훈련(?)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지식과 정보가 넘치는 오늘날, 정작 사람됨을 기르는 국민 교육은 점점 자취를 감춰가는 듯해 아쉽기만 합니다. 만약 한 나라에 멋진 철학과 국민 무도가 제대로 뿌리내렸다면, 우리 사회도 훨씬 더 단단하고 품격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요.


수년 전, 번아웃으로 무너졌던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다시 태권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심신 중증 골다공증으로 지쳐 있던 제게 태권도는 맞춤 처방이자 정신의 활력소였습니다. 운동이라면 무엇이든 좋지만, 기상이 살아나지 않으면 그 어떤 운동도 오래가기 어렵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태권도는 몸과 마음을 함께 단련하는 수련이기에 제게는 더욱 특별했습니다.


도장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50대 중반의 초보 수련생을 받아주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태권도는 대부분 어린이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지요. 원래는 성인 중심의 무도였는데 말이죠. 결국 초등학생 틈에 끼어 중학생 선배의 도움을 받으며 눈물겹게 품새를 익혔습니다. 어린 친구들 사이에 있으려니 처음엔 꽤 어색하고 민망했지만, 꿋꿋이 버텼습니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그 시간이 제게는 큰 배움이었습니다. 불편한 시작 속에서 이미 극기와 인내, 용기 같은 태권도 정신을 몸으로 익히고 있었던 셈이니까요. 이 정도면, 준비된 태권 인재라 불러도 손색없지 않을까요?


1단 승단 심사 날, 키 작은 초등학생들 틈에 끼어 인사를 드리자, 심사위원분들이 놀란 듯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반절 인사를 해주셨습니다. 긴장한 상태에서 예상치 못한 정중한 환대에 웃음이 터질 뻔했지요. 덕분에 자존감이 차오르고, 심사도 실수 없이 깔끔하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태권도 수련 덕분에 폐차 상태였던 심신이 되살아났습니다. 주차장(?)을 벗어나 제법 주행거리도 늘었고, 눕방에 최적화되어 있던 내가, 산책형 인간으로 변했습니다. 기상이 살아나고, 건강이 회복되니 삶 전체가 달라졌습니다. 태권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사람을 성숙한 시민이자 능동적인 존재로 성장시키는 힘이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태권도가 가진 진정한 힘이 아닐까요?


오늘 도장에서는 2단 단상 차기와 앞 돌려차기 연속 동작을 연습했습니다. 생각보다 동작이 자연스럽게 나와 스스로 한껏 칭찬해 주었지요. 예전엔 평지에서도 곧잘 넘어졌는데, 이젠 다리에 제법 힘이 붙은 모양입니다. 공중 부양(?)을 마음껏 하고 나니,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가끔 도복 차림으로 동네를 걷다 보면 홍해의 기적이 펼쳐지곤 합니다. 편의점 앞에서 담배 피우던 대학생도, 취기 오른 직장인도 내가 지나가면 어김없이 담배를 숨기고 조용히 길을 터줍니다. 소심한 나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제법 당당한 시민이 된 기분이지요. 무료한 일상 속 작은 기적을 만나고 싶다면, 태권도 도복 한 벌이면 충분합니다.


현재 전 세계 210여 개국이 태권도 회원국으로 등록되어 있고, 일부 국가는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해 가르치고 있다니, 듣기만 해도 뿌듯해집니다. 누가 뭐래도, 태권도는 이제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무도이자 생활 스포츠가 된 것 같습니다. 원조 한류 열풍도 바로 이 태권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이 멋진 무도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사랑받고, 더욱 품격 있는 프로그램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대한의 기상이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얼마 전, 태권도 3단 승단 심사에 합격했습니다. 내친김에 4단까지 도전해 보려 합니다. 태권도는 무너진 내 정신을 세우고, 비틀렸던 몸을 바로잡아 준 생활 속 수련이자, 든든한 반려 운동이니까요.


흙먼지 날리던 그날의 운동장에서, 제 첫 번째 인생이 꿈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곳 도장에서 두 번째 인생이 새롭게 열리고 있습니다.


태권도의 기상이 다시 살아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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