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 전 어둑어둑해진 어느 초저녁.
우리는 먹음직스러운 콤비네이션 피자 한 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나는 거제도로 내려가야 했고 촉박한 일정 때문에 늦은 저녁에 출발해야 했다. 그 때문에 미처 저녁을 준비 못 한 그녀는 저녁 메뉴로 피자를 선택했다. 그때 나에게 저녁식사는 그저 귀찮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민생고의 하나일 뿐, 맛을 음미하거나 오붓한 분위기와 행복이 넘치는 액자 속 그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배만 채우기만 하는 육신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원초적인 허기짐을 잠재우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이라고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녀에게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 대해서 그저 막연하게 잘 될 것이라는 호언장담만을 남발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모습과 상반되게 그녀는 다소 경직되고 냉정한 모습이었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과 어떤 말이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약간의 걱정스러운 표정과 조심하라는 정도의 절제된 말이 전부였다. 그렇게 혼자 들뜬 나는 피자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흥분한 상태로 주절대며 피자를 꾸역꾸역 먹었다. 그러고는 서둘러서 짐을 챙기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대문을 열고 나온 후 문을 닫기 전에 배웅을 하기 위해서 문 앞에 서있던 그녀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표정은 불안함인지 걱정스러움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금의 아쉬움이라는 감정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상쇄시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집에서 떠나야 했다. 그 방법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 당시 짠맛으로만 기억되는 피자 몇 조각의 저녁식사가 우리의 마지막 저녁식사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차를 타고 밤새도록 거제도로 내달렸고 휴게소에서 쪽잠을 자며 집에서 챙겨온 다 식어빠진 피자 두어 조각으로 허기를 달랬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거제도는 마냥 낯설었고 일도 꼬여만 갔다. 낯선 곳에서 우왕좌왕하며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결국 버스와 교통사고가 났다. 멘탈이 와르르 무너졌다. 모든 게 엉망진창 뒤죽박죽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했고 또다시 길거리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후줄근한 모습으로, 보험사에서 임시로 대여해 준 꼬질꼬질한 경차를 끌고 다니며 지친 몸을 눕힐 곳을 찾기 위해서 낯선 곳을 헤매고 있었다.
삶의 끝자락이라고 느낄 때쯤 어느 우연히 만난 한 사람 덕분에 비어있는 공장 숙소에서 일주일을 굼벵이처럼 꼼지락거리며 간신히 연명하며 지냈다. 최악 중에 최악인 상황과 인간으로서, 남자로서, 나 자신의 실체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것은 차라리 저주에 가까웠다. 이런 몰골로 여태까지 살아온 나의 몰골이 한심하다 못해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알량한 나의 목숨은 뭐가 그리도 아직 미련이 남아있었는지, 용기를 닮은 그런 객기조차 남아있지 않음을 느끼고는 황망함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인간은 과연 어느 정도의 상황에 몰려야만 이런 자신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을까? 이제라도 이런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것이 다행이며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나는 이렇게 된 상황이 신의 축복인지 아니면 악마의 저주인지는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나 알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실소가 터져 나올 만큼 유치하고 치졸했다. 그 당시 나에겐 단 한 가지, 구차한 목숨이라도 지닌 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과 어디로 가야 할지 삶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 시급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몸부림이었다. 인간은 절대 변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날 이후 나는 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겉모습이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인가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날카롭고도 냉정한 자기비판이었고, 이윽고 후회와 스스로의 체벌이 이어졌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에 내린 적절한 심판이었다. 생각이 그쯤에 이르자 모든 연락과 소통을 단절했고, 검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나만의 동굴로 기어 들어갔다. 그곳은 어둡고 습하며 죽음처럼 적막했다. 두려움과 공포 대신 오히려 아늑함과 편안함이 먼저 느껴졌다. 가끔 찾아오는 외로움이란 그저 한낱 사치에 불과했다. 간신히 허기만 가실 정도의 식음을 해결하는 피폐한 생활은 안갯속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오르듯이 지루하고 암담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안락함이 찾아오면 지난 시간을 기억하며 그리워하는 것이 유일한 사치이자 취미가 되었다. 사소한 모든 일상생활은 나에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인간은 그저 순간만을 살아갈 뿐인데 그 순간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아마도 그것을 인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마지막 저녁식사는 그렇게 나의 기억 속에 오래된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그리운 찰나가 되어있었다. 다시는 못 볼 쓸쓸하고 공허한 그녀의 눈빛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