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이왕 탄김에 힙해지기로 했다.

파운데이션 34호를 바르게 되면서 깨달은 것들

by 양양이

남자분들은 잘 모를지도 모른다. 사실 심지어 여자분들도 모르는 사람도 많다. 나도 몰랐다 사실. 파운데이션에서 34호가 있다는 것을. 여기는 한국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21호, 23호를 사용한다. - 숫자가 높아질수록 색은 더 어둡고, 진해진다 - 더 다양한 색상의 파운데이션도 많지만, 30호 이상을 바르는 사람도 드물 것이고, 시중에 잘 판매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만 판매하는 희귀한 색상이다. 파운데이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는 내가 34호를 쓸 만큼 피부가 까맣게 타버렸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태닝 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파운데이션 색상이다.


올 3월 나는 잘 다니던 회사를 퇴직했다. 번아웃이 온 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체력적인 문제가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온전하지 못했다. 그냥 너무 힘들었다. 제발 쉬고 싶다고 몸과 마음이 아우성을 쳤다. 공항에서 근무를 할 적에는 엄마랑 여행을 자주 다녔었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여가 시간이 전혀 없어지게 되었고, 새로 이직한 직장에서도 밤낮없이 잠을 줄여가며 일을 했다. 결국 난 탈진을 해버린 상태였다. 이왕 쉬게 된 거 여행이나 아주 왕창 다니자 싶어서 퇴직하고 한 달 동안은 집에 거의 없었다. 어딘가로 계속 이동과 여행 중이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단 둘이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엄마도 정년퇴직하신 직후라 시기가 딱 맞았다. 우리는 필리핀 보홀로 떠났다.


그곳에서 일주일은 엄마랑 지냈고, 그다음 일주일은 때마침 여행시기가 겹친 친구와 같이 여행했다. 그 친구는 DJ 이에 댄서였고 프리다이빙을 하는 아주 힙하고 멋진 스타일을 추구하는 친구였다. 태닝을 열심히 하는 친구라, 이미 필리핀 현지인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탄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태닝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그 친구와 있으니 자연스럽게 내 피부도 까맣게 그을려지게 되었다. 보홀에서는 몰랐다. 그냥 피부가 좀 탔네 싶었다. 그리고 친구의 친구들도 같이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들은 프리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다들 태닝이 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피부에 대해 그다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왔고, 더 이상 나에게 맞는 파운데이션이 없었다. 쿠팡에서 급하게 새벽배송으로 주문했다. 당장 내일부터 쓸 화장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34호 카푸치노 색이었다. 파운데이션 색이 카푸치노 일수 있다니. 나도 놀랬지만 내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은 더 놀라워했다. 이렇게 까만 파운데이션은 처음이야라고 말이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어울리는 화장은 미국 캘리포니아 언니들의 핫걸 메이크업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핫걸이 되기로 했다. 이왕 타버린 피부를 하얗게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뭐 탄김에 힙해지기로 했다.


화장법을 바꾸고, 힙한 느낌의 옷과 액세서리를 새로 샀다. 나의 달라진 모습에 친구들은 외국인 같다고 해주었다. 처음에는 쑥스러웠다. 그리고 너무 새까맣게 타버린 내 피부를 보고, 사람들이 놀랄까 봐 만나기도 전에 미리 부연설명을 하느라 바빴다. '나 까마니까 놀라지 마'라고 미리 카톡을 보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를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들 똑같았다. 놀란 눈으로 다들 바라봤다. 하지만 변한 나의 스타일이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멋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그 옷은 어디서 산거냐 나도 사면 안 되냐는 질문도 받았다. 나는 태도도 바뀌었다. 외모가 힙해지니, 마음가짐도 힙해진 기분이었다. 복장에서 오는 마음가짐은 늘 다르지 않는가. 정장을 잘 차려입었을 때와 트레이닝복을 입었을 때 나의 기분과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처럼.


나는 옷 입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외모를 꾸미는데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을 몇 차례 겪은 뒤로 살이 찌기도 했고, 사업을 하면서 옷을 입을 시간 같은 건 사치였다. 내가 무슨 미국에 재벌들이라도 된 마냥, 똑같은 티셔츠 10장, 똑같은 바지 10장을 사놓고 매일매일 그것들을 돌려 입었다. 하루 5시간 자는 스케줄에서 옷을 골라 입는다는 것은 사치였다. 점점 꾸미지 못하게 되었고, 근 3~4년 사이에 어떻게 옷을 입었었는지 조차 까먹어버렸다. 내 스타일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예전엔 화려하고 공주님 같은 여성스러운 스타일도 자주 입고, 섹시한 스타일도 서슴지 않고 잘 입었었다. 나는 다시 조금씩 잃어버렸던 나의 스타일을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바뀌었고, 나의 스타일도 예전과는 달라져서 처음엔 쑥스러웠지만, 그냥 당당해 지기로 했다. 사실 좋은 반응만 있었던 건 아니다. 왜 이렇게 탔냐, 너무 까맣다 이상하게 탔다 등등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사람들은 부정적이게 이야기했다. 늘 있는 종족이다. 또 뭐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의 눈빛이 아직 익숙하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타인을 늘 낯설어하고, 간혹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구경 나오기도 한다. 나는 내가 익숙해져서 잊고 있었는데, 사실 다들 나를 보고 흠칫 놀란다. 나도 살면서 이렇게 까맣게 탄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다시 여유를 찾은 기분이었다. 옷을 골라 입고 화장 스타일도 여러 가지로 도전해 보고,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간에 스트레스와 번아웃에서 서서히 치료가 되는 기분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 하는 마음이었다. 살다가 의도치 않았지만 의외의 것에서 삶의 기운을 차리기도 한다. 이왕 탄김에 힙해지기로 하자. 너무 새까매도 괜찮아. 멋있어졌으니까 오히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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