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푸르르고 뜨거운, 열정 가득한 나의 시절
마흔을 곧 앞두고 있다. 1987년생이라 한국나이로 39, 만으로는 38세이다. 예로부터 불혹이라 함은 세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왜 이리도 휘청거리는지 모르겠다. 20대 때 청춘일기라는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언젠가 아이크림을 발라야 하는 때가 올 거라던 나의 글은 마냥 행복했고, 순수했고, 고민이 있었더라도 큰일이 아닌 것 같았다. 다 지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분명할 테지만, 나는 아직도 그 청춘일기를 썼던 사람과 마음만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이제는 아이크림으로도 부족해 피부과 시술을 받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말이다.
올해 여름은 특히나 더웠다.
더웠다는 말은 너무나 부족한 표현이다. 무더웠고 찌는듯했고 말라죽을 것 같았다. 폭우로 인한 홍수가 잦았고, 사람들은 더 이상 한국날씨는 동아시아 날씨를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덥고 습하고 스콜성 소나기가 내리는 동남아 날씨와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는 점점 더 더워질 일만 있다고 뉴스에서는 연일 보도했다. 지구 온난화는 이제 더 이상 막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올해 여름은 그렇게 피부가 따갑도록 뜨거웠다.
내 시절을 계절로 따지자면, 난 아직도 한여름 뙤약볕에 서있는 것 같다. 땀이 줄줄 나서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간절하게 느껴지는 그런 치열한 여름. 아직도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많고 이룬 것보다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뜨거운 태양의 열기 아래서 그늘로 피하지 못해 피부화상을 입어 살갗이 빨갛게 다 벗겨지는, 그런 아픔도 같이 찾아왔었다. 나는 11년간 공항에서 안전하게 일해오다 같이 한식당을 차리자던 전남자친구의 제안을 거절 못해 결국 내 전재산을 모두 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식당은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공했다면 성공했다고 말할 정도로 잘되었다. 다만 망한 것은 나와 남자친구의 관계. 그리고 무너저버린 내 인생과 마음이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많은 갈등을 겪었다. 분노했고, 서로를 혐오했고, 그 마음들은 성난 불에 휩싸여 까맣게 타버려 재가 되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칼날 같은 말들을 서로에게 쏟아내며 찔려서 피가 났고, 그 상처의 골은 깊어만 갔다. 그렇게 결혼과 미래를 약속했던 6년간의 연애를 마감하고 결혼직전,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아직 처음에 투자한 투자금조차 회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난 일순간 전재산을 잃고 무너져 내려 버렸다.
빈털터리가 된 그때. 부모님께 다시 돌아가야만 했던 그때가 눈앞에 선하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다시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나를 반겨줄 곳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따뜻한 것이었다니.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을 진행시켰던 나는 염치 불고하게도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마음에 큰 생채기를 얻었지만 쉴 수 없었다. 끄끝내 살아내야 했던 나는 한시도 쉴 새 없이 다시 일에만 전념했다. 내 마음을 돌볼 시간도, 내가 얼마나 아픈지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늘을 살아내야 했고 또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터널을 몸과 마음이 다 지쳐서는 질질, 스스로를 끌고 가는 기분이었다. 어질어질한 뜨거운 퇴양볕에 그대로 노출된 기분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여름이 막 시작 되어가던 날 아침
참새가 내 앞으로와 짹짹거렸다. 총총걸음 걷다가도 이내 멈추고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런 여유가 더없이 소중했구나. 잠시 참새를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오래간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흔한 풍경이 나에게는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나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나는 왜 이런 보통의 것들을 잊을 만큼 각박하게 살아왔나 싶었다. 그날 아침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평온하고 따뜻했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냥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다. 증오로 잠못이루던 날들도 이제는 애증으로 변한 것 같다. 이제는 여름의 매미떼의 울음소리도 들리고 개울가에 개구리 소리도 잘 들린다. 둑길 옆 졸졸 흐르는 냇물 소리도, 푸르르고 울창한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도 들린다. 그래서 다시 꿈꾸게 되었다. 내가 나로 살지 못했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더 이상 하지 못했던 일들로 인해 후회하기도 싫었다.
아직 나는 이루지 못한 것들로 가득하고, 하고 싶은 일들이 손으로 헤어리지도 못할 만큼 많이 남아있다. 그렇게 꿈꾸던 작가로서의 삶도 살아보고 싶고, 그렇게 꿈만 꾸던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 현지인만큼 유창한 영어실력도 가지고 싶다. 더 멀리 지구 반바퀴를 돌아 깊은 바닷속 만타가오리 떼도 직접 보고 싶다. 스위스에 만년설도, 아일랜드의 오로라도 보고 싶다. 그저 나는 너무 뜨거운 여름볕에 잠시 열사병을 앓았던 것은 아닐까. 내가 더운지 뜨거운지 그 뜨거움에 내 몸이 타고 있는지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나를 돌보지 못했던 시간들이 있었을 뿐이다.
아직 나의 여름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한여름을 거니는 중이다. 잠시 그늘에 쉬어가고 있을 뿐이다. 주위풍경도 보면서, 시원한 물도 들이켜면서 그렇게 지나온길에 흘린 땀을 닦으며 다시 일어서 걸어 나아갈 때를 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 푸르르면서 뜨겁고 열정적이면서 시원한 그런 여름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