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나는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이다. 일종의 각성제라고 해야 할까. 하루가 활기차지 않고 우울하고 에너지가 없다면, 그날은 커피를 깜빡하고 마시지 않는 날이다.
내 취향은 한결같다.
늘 어느 카페이건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연하게"를 주문한다. 쓴걸 잘 못 먹는 스타일이라, 연하게 먹지 않으면 사약을 마시는 기분이랄까. 커피를 좋아하는 어떤 이들에겐 아이스 아메리카노 연하게는 그냥 커피 물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밍밍한 커피에서 주는 약간의 고소함정도면 된다. 그래놓고 하루에 커피를 여러 잔 마시긴 한다. 커피는 이제 더 이상 기호식품이 아니라 현대인의 필수품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하는데, 연하게 라는 단어가 문뜩 떠오르질 않았다.
아침마다 공항에 있는 스타벅스는 오픈런을 해야만 했다. 새벽 6시에 출근하는 사람들, 새벽에 출국하는 승객들이 붐벼 모두가 스타벅스를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주문할 때가 다가왔고, 내 뒤로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심지어 신입은 언제나 커피심부름 담당이었다. 같은 카운터 근무하는 선배들의 주문까지 해야 해서 압박이 심했다. 모두가 자기 취향대로 커스텀 주문을 했기 때문에 내 주문은 시간이 많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두유라테에 바닐라 시럽 2 펌프 라던지, 모카라테에 휘핑 빼고 얼음은 반컵만 이라던지 심지어 각자 줬던 다양한 종류의 카드와 포인트 카드까지 함께 써야 했던 것도 있고, 현금영수증까지 알뜰하게 챙겼어야 했다. 선배들의 커피는 야무지게 포스트잇에 적어와 꼼꼼히 말했지만, 내 커피를 주문할 때 갑자기 연하게 라는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내 입에서 임기응변 이라고 나온 말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흐리게 주세요"
내 주문을 받던 스타벅스 직원도, 커피 주문을 기다리던 손님들도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모두 같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 나는 주문한 커피를 다 받아 들고 카운터로 다시 복귀할 때 까지도 연하게 라는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나중에 동기들에게 말하면서 왜 그렇게 단순한 단어도 생각이 안 났을까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 같이 웃었다. 내 인생은 이렇게 콩트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연하게든 흐리게든 어찌 되었건 뜻만 일맥상통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혹시나 삶을 살아가면서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자책하거나 고민하지 말자. 아 이게 아니었는데 싶다가도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는 일인 것을. 그때는 이렇게 생각해 보자. 대충 아이스 아메리카노 흐리게라고 말해도 아무 문제 없었던 양양이를. 인생 콩트같이 살면 한번 더 웃을 일이 생긴 거지 뭐!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