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색 정장을 입은 남자의 이야기(1)
밥을 다 먹고 식당을 나와 두오모로 향했다. 햇빛은 새벽부터 내려앉았던 푸른빛을 천천히 먹어 삼키고 나서 보다 더 완연한 모양새로 제 빛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높은 빌딩들 옆으로 나 있는 길을 찾아 그늘 속에서 발을 움직였다.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왼쪽 편에서 사람들 여럿이 모여 떠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근처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인 것 같았다. 다들 낮은 채도의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이크아웃 커피점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니, 출근 전에 커피를 한잔 마시고 가려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그중에 가장 키가 큰 남자가 옆으로 나 있는 난간에 오른팔을 기대고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감색 정장을 입고 어두운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쳐서 잠시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가 완성된 커피를 받으러 몸을 돌려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두오모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왼쪽으로 성큼 걸어가 카페 앞에 서 있는 줄의 마지막에 섰다. 그러나 메뉴판을 봐도 이탈리아어를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커피를 마시는지 관찰하기로 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에스프레소를 많이 마셨다. 작은 잔에 진한 갈색 커피가 담겨 있었는데, 그 때문에 공중에 떠도는 향이 깊고 좋았다. 나는 커피를 잘 못 마시는 편이지만 이탈리아에 왔으니 에스프레소를 마셔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다른 메뉴는 잘 알지도 못했다.
“에스프레소 한 잔이요. 마시고 갈게요.”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어느새 내 차례가 되어 주문을 마친 뒤, 나는 직원이 시킨 대로 매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작은 카페 안은 밀린 주문으로 분주했다. 이윽고 내 커피가 완성되어, 나는 카페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침 먼저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를 막 뜬 참이었다. 원형 테이블 위로 파라솔이 있어서 햇빛을 피하며 커피를 즐기기 좋았다.
“여기 앉아도 되나요?”
고개를 들고 보니 아까 봤던 감색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내 맞은 편의 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맙다고 말한 뒤 손에 들었던 에스프레소 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손을 뻗어 테이블 중앙에 놓인 자그마한 설탕 봉지를 하나 집어 들더니, 설탕을 커피잔 안으로 모조리 부었다. 그 뒤 작은 티 스푼으로 커피를 두 번 정도 휘휘 젓고는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에스프레소를 마셔버리는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잔을 내려놓은 그가 나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영어로 물었다.
“이탈리아에 처음인가요?”
“네. 여행으로 왔어요.”
이어지는 침묵 속에 어색해진 내가 에스프레소는 처음 마셔봐요,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한 대로 설탕 봉지를 집어 손으로 찢었다. 커피잔 안으로 반투명한 카멜색 설탕이 우수수 쏟아졌다. 한두 번만 저으면 맛이 쓸 것 같아서, 나는 커피를 서너 번 더 젓고 나서 한 모금을 마셔 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깊은 향과 맛이 입 안을 맴돌았다.
“정말 맛있네요.”
“커피를 다 마시면 더 맛있는 게 남아있어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더 맛있는 거라니? 의중을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해진 내가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남은 커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따뜻한 액체가 목 뒤로 넘어가며 구수한 향과 기분 좋은 쌉싸름한 맛이 느껴졌다. 감각을 깨우는 맛이었다.
“어디에 있죠?”
“잔 안을 자세히 봐요.”
그가 검지로 커피 잔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티 스푼으로 잔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설탕을 긁어 한데 모은 뒤 입에 넣어 아작아작 씹어 먹는 게 아닌가. 나는 덩달아 그 맛이 궁금해져 그를 따라 설탕을 긁어먹었다. 에스프레소에 절여진 설탕 알갱이들이 혀 위에서 저들끼리 마찰하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해변에서 모래를 밟으면 나는 소리 같았다.
“쓰고 깊은 맛 뒤에 단 맛이 남아있죠.”
그가 마치 비밀을 말하듯 한 손을 입 옆에 대고 작은 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터져 작게 웃었다.
“이제 어디로 떠나나요?”
만면에 미소를 띤 그가 물었다.
“두오모요. 어릴 때부터 먼저 다녀온 사람들에게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었어요. 기대 중이에요.”
“그렇군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기는 해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빈 커피잔을 들여다보았다. 손잡이에 오른 엄지와 검지를 살짝 걸어놓고 컵을 시계 방향으로 굴리며 눈을 잠시 크게 떴다가 한번 깜빡였다.
“제가 비밀을 하나 더 말해줄까요?”
“비밀이요? 어떤 비밀을요?”
“저는 밀라노 출신이 아니에요. 이탈리아 남부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 때까지 쭉 그곳에서 자랐어요. 제가 살았던 곳은 아주 오래전에 수도사들이 정착해서 건물을 짓고 터전을 닦은 소도시였어요. 마을 사람들은 종교와 전통을 중요시해서 도시의 한가운데에 큰 성당을 짓고 예술가들을 불러 성당의 벽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고 바깥에는 신의 모습을 한 조각상을 만들게 했죠. 그리고 그걸 보존하는 일에 힘썼어요.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나 운영하는 가게의 건물 외관을 함부로 바꾸지도 못했어요. 그건 엄밀히 말하면 개인의 소유가 아니었으니까요. 상상이 되나요?”
예전에 프랑스 소도시에 갔을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샤롤 드골 공항에서 내려 작은 비행기로 한 시간을 더 가면 나오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는데, 문화 예술로 유명해서 관련 행사를 할 때 프랑스 대통령도 방문해 프랑스의 예술과 예술가를 알리고 기념하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 오래전에 정착해 액자를 만들어 파는 가게와 작업실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한국인 화가에게 마을 가이드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그가 사는 작은 아파트의 외관을 새로운 색으로 페인트칠하려 했는데, 알고 보니 국가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어느 날 집으로 공문이 날아와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아마 마을 주민 누군가가 신고를 한 것이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마을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노란빛을 많이 띠는 연갈색 톤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는 이후에 마을 가이드를 하며 내게 개울 중앙에 있는 나무로 된 작고 낡은 다리를 보여주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잠시 어리둥절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고흐가 그 마을에 머물며 그림으로 그린 적이 있는 다리였다. 그는 다리를 가리키며 어느 누구도 그 다리를 함부로 건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본다고 말했다. 그림 속 다리와 외관이 비슷한 그 다리는 갑자기 특별해 보였다가 초라해 보이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네. 비슷한 사례를 들은 적이 있어요.” 내가 대답했다.
“오래전에 정착한 수도사들은 성당 뒤 켠에 있는 산에 갤러리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미술관 같은 화이트 큐브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즐길 수 있는 갤러리를요. 사람들은 고민했어요. 어떤 작품을 만들어 전시할까 하고요. 예술가들과 오래 논의한 끝에 그들은 다섯 개의 나무 조각상을 만들어 산의 입구에 나란히 세웠어요. 그러고는 또 어떤 일을 했을지 상상할 수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실내 공간이 아닌 자연 속에 어떻게 갤러리를 만든다는 말인가. 순간 공공 미술이 떠올랐지만, 그건 답이 아닐 것 같았다.
“사람들은, 천국을 만들었어요.”
“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