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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민기 minki Aug 23. 2024

비탈길 끝의 풍경들(1)
-'영도로터리'

-제2영도교회와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남여상)

#-1. 영도로터리세일러복의 누이들     


  내가 살았던 비탈길은 버스 종점이었던 영도로터리에서 시작된다. 로터리는 모두 다섯 갈래의 길들로 흩어지는데 남항초, 흰여울마을, 영선동, 남포동 방면으로 난 길들은 모두 크고 작은 차들이 지날 만한 길들이지만 우리집 방면의 비탈길은 오롯이 사람이 걸어 올라야 하는 길이었다. 그 오르막길 끝엔 부산남도여중과 부산남여상이 있어서 매일 아침이면 세일러복 차림의 누이들이 떼를 지어 비탈길을 올랐는데, 동네의 별난 사내아이들 몇몇이 그 누이들의 뒤를 따라 오르며 ‘아이스께끼’를 외치며 누이들의 치마를 들추곤 했다. 지금 같으면 ‘촉법소년의 성범죄’로 뉴스에 날 만한 일이었다.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cbnets/221879770442                 남여상 등교 풍경은 아니지만 대개 이와 비슷했던 풍경이다.

  그렇게 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나면 비탈길은 하루종일 텅 비어 그때부턴 온전히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차들도 없고 오르내리는 사람도 드문 비탈길에서 아이들은 저마다 판자에 양초를 문질러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리기도 하고, 비탈길들에 잇닿은 골목길에 들어 술래잡기, 딱지치기, 진놀이(그땐 다스망구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들로 해가 질 때까지 놀았다. 가끔 골목길이 붉은 노을로 환해지기도 했는데, 그 시간 때쯤이면 “OO야~ 밥 먹으러 온나~”하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골목 밖에서 들려오곤 했다. 그렇게 하나 둘씩 아이들이 불려 들어가고 나면 비탈길과 골목에는 촉 낮은 가로등이 밤을 밝혔고, 선선한 날이면 비탈길 따라 내놓은 몇 개의 평상들에 동네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화투도 치고, 채소도 다듬는 밤풍경이 비탈을 채우곤 했다.

로터리 주변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직한 가게들은 간판과 외벽 도색만 달라졌을 뿐 옛 몸집 그대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가장 예스러운 풍경이지 싶다.

 

#-2. 2영도교회와 '나명자' 선생님...

 

 그러나 그 비탈길 평상의 서사 가운데 가장 선명한 것은 ‘나명자’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다. 로터리에서 집으로 오르는 비탈길 중간쯤에는 ‘제2영도교회’라는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다. 교회에서 주는 간식거리는 온 동네 아이들을 열혈 신도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유소년부 담당 선생님이 예쁜 여자 선생님이라면 전도는 그걸로 끝난 셈. 그 선생님 이름이 ‘나명자’였. 그 선생님은 영도다리 근처에 있는 제일은행 행원이었고, 우리집을 지나 비탈길 끝 골목 어딘가에 자취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퇴근길은 항상 우리집 앞을 지나게 돼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그 평상에 오목하니 앉아 선생님을 기다렸다. 누이들은 그런 내가 귀엽다며 선생님께 잘 보이려면 예쁘게 꾸며야 된다고 머리를 이리저리 빗기며 가르마를 타주었다. 비탈길 아래서 선생님이 걸어 올라오면 쪼르륵 뛰어 내려가 선생님의 손을 잡고 비탈길 끝까지 함께 걸어 올랐다. 그 아득했던 길은 그때마다 너무 짧게 끝난 듯하다.

옛날엔 붉은 벽돌 양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유리와 철제로 마감되어 유독 눈에 띄는 몸집이 되어 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은행에서 나온 기념품이라며 복주머니 모양의 플라스틱 저금통을 하나 주셨다. 부산을 떠나 여기저기로 몇 해를 이사 다니면서도 내가 제일 먼저 챙겼던 건 그 저금통이었다. 그 저금통을 가득 채워서 선생님이 계신 은행으로 들고 가는 게 내 거창한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다 채워지지 못한 채 어느 이삿길에 놓치고 말았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 이름과 그 이름으로 외웠던 숱한 날들의 주기도문. 몇 해 전, 들렀던 고향길에서 제2영도교회의 번듯해진 건물을 보며 그 선생님의 생 또한 저리 빛나고 우뚝하길 빌었던 적이 있었다.


#-3. ‘OO이랑 어울리지 마라'에서 'OO이 봐라~’가 되기까지...


  어느 해 여름밤이었던가... 방학이 되어도 딱히 할 게 없었던 동네 아이들은, 별나기로 소문난 몇몇 형들을 따라 남여상 담장을 넘었던 적이 있었다. 그 형들 가운데 옆집 사촌형은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기에 그런 자리엔 늘 앞장서는 인물이었고, 평소 숫기 없던 나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날은 형을 따라 그 담장을 넘게 되었다. 그 당시 사촌형은 대개 어른들이 “OO이랑 어울리지 마라”라고 할 때의 그 OO에 해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멀고 가까운 친척들을 통틀어 가장 부유하게 산다. 그 형이 부유하게 살기 시작하니 집안 대소사 모임에서 그 형은 어른들에게 자녀 교육의 모델이자 위안이 되었다. “그래, 공부가 다가 아니다. OO이 봐라.”, 혹은 “OO이 봐라. 어릴 때부터 남다르더니 역시...” 이제 형은 그런 OO이가 되었다. 변변찮은 살림에 대학 강사 자리에 연연하며 살던 때에 나는 그런 어른들의 변심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장손임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핑계로 집안 대소사에 되도록 나다니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 또한 먹고살 만한 상황이 되고 나니 어른들의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 자신부터 그리 변해버린 건 아닌지, 스스로 조심스러울 때도 있다.

남여상 화단에서 사촌들과 찍은 사진이다. 맨 왼쪽이 OO형이다. 아마도 명절 즈음이었던가 보다. 누이들의 옷으로 덧댄 빨간 멜빵바지가 부라더미싱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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