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는 삼형제 가운데 맏이었다. 아비의 고향은 겨우 십여 호 남짓한, 강변의 작은 집성촌 마을이었다. 아비의 아비는 비록 넉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편도 아닌 전답으로 농사를 지으면서도 자식들의 교육엔 무관심했다. 아니 오히려 농투사니 자식이 글은 배워 뭘 하느냐,며 자식들도 강변에 붙은 전답을 일구며 대를 물려가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누구는 배산임수의 땅을 길지라고는 하나, 그것은 물길이 들판 멀리 물러나 있을 때의 이야기다. 아비의 고향 땅은 마을 앞으로 물길이 바싹 붙어 있던 터라 대대로 같은 성씨를 물리며 살아 온 십여 호의 일가들은, 모두가 고만고만한 살림으로 높낮이 없는 풍경을 이루고 살았다 한다. 강 옆에 있는 전답들임에도 가뭄 때면 작물들이 땡볕에 시들었고, 강 옆에 부린 삶터였기에 장마 때면 몸집을 불리는 강물에 마음을 졸이며 집집마다 뒷문을 열어놓아야 했다. 그래서 십여 호의 집성촌은 아비가 어릴 때나 아비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가난한 풍경으로 한결같았다. 아비의 아비는 대대로 물려 온 그 풍경과 살림살이를 운명처럼 껴안고 살았다. 아비의 아비뿐 아니라 그 아비의 아재들, 아지매들이 모두 그러했다.
강의 물굽이는 마을쪽에서 휜다. 그래서 강물이 넓게 품은 들판은 반대편 자락으로 펼쳐진다. 터가 좁았던 이쪽 마을 사람들은 강물살에 몸을 부비며 살아야 했다.
그 변하지 않는 살림의 풍경이 갑갑하게 여겨진 건 아비 나이 열 대여섯 무렵이었다. 아비는 천역을 치료하러 대처에 한 번 다녀오겠다는 이유를 내세워 뒷산 고개를 넘었다. 마침 대처에 번듯한 살림을 꾸려 살던 아비의 고모는 아비를 거두어 주었다. 농투사니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아비는 또래보다 늦은 공부였지만 밤마다 이를 앙다물었다. 비록 고모네 살림이 번듯하다고는 하나 제대로 힘 쓰는 일조차 익숙지 않았을 열 대여섯의 사내아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스스로의 처지에 눈칫밥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기초도 없이 막막하기만 했던 공부였지만 아비는 다시 그 강변마을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공부를 했고, 졸업을 앞둔 시점엔 전교권 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농사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비에게는 농사보다 더 절실했던 까닭일 것이다.
고모집에서의 3년을 눈칫밥으로 버티는 동안 아비의 아비는 쌀 한 말 보내오지 않았다. 딸을 출가외인으로 여기던 시대에, 아들의 뒷바라지를 감당하는 여동생집에 농사 지은 작물 하나 보내지 않는 오라비를 그 여동생의 집안에선 무슨 말로 타박을 했을지...일찍 철이 든 아비는 그런 고모의 시집살이가 지레짐작 불안했다. 그 시절 대학은 열아홉의 사내 아이가 홀로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현실이었다. 아비는 당장 스스로 먹고 살 일을 고민해야 했고, 그것만으로도 고모의 짐을 더는 일이라 여겼더랬다. 이제 생존은 온전히 아비의 몫이었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는 아비에게는 마치 낭떠러지와도 같은 것이어서 아비의 하루하루는 늘 가슴 졸이는 날들이었다.
아비의 고향 마을은 저 산구비를 여럿 돌아 들어야 나온다. 그 마을을 지나면 창녕보가 강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준다.
그 불안하고도 절실했던 생의 한 때가 부산 영도였다. 교정직 공무원의 박봉이기는 했으나, 그때껏 아비의 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주인집 눈치없이 온 가족을 한지붕 아래 불러앉힐 수 있었던 몇 년이었다. 아비를 따라 고개를 넘은 아비의 동생이 대처에서 잡역으로 시작해 소목, 대목까지 기술을 익혀 지은 집이었다. 한 지붕 아래 블록으로 칸만 질러 한 칸은 형님네에 선뜻 내어 준 대목장이 아비의 동생이 베푼 후한 인심이었다. 비탈길에 지어 올린 한 지붕 아래에서 형제는 서로 위안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약간의 시샘으로 마음을 흘기며 살기도 했을 것이다. 쌀장수를 했던 아비의 동생네는 늘 사람들이 북적댔고, 시절 따라 유행하던 가전 제품들을 세간으로 들이기도 했다. 반면, 박봉의 공무원 월급과 조그만 문방구로 일곱 식구의 생계를 꾸려야 했던 아비의 살림에는, 누이들 옷들을 물려 입히기 위한 재봉틀이 유일한 세간이었다. 말수가 없고 잔정 표현에 서툴렀지만 아비의 아내는 가난한 세간살이에도 투정 한 번 없이 묵묵히 재봉틀을 돌리며 아이들의 옷들을 지어냈다. 어미의 손끝에서 튿어지고 나누어진 누이들의 옷은 외동이었던 아들의 멜빵바지가 되기도 있었고, 색색의 주머니가 따로 붙은 셔츠가 되기도 했다. 사내이 옷치고는 색감이 환했던 외동아들의 옷들은 상표가 없었기에 목덜미 꺼끌거림도 없었고 니글거리는 기름냄새도 없었다. 그것은 늘 부드러운 감촉이 뚜렷했으나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은 아니었다. 아이가 빨리 자라는 까닭도 있었겠지만, 옷들이 빨리 튿어진 까닭이기도 하다.
부라더미싱...어미는 이 앞에 앉아 있는 날들이 많았다.rㅗ
TV도 세탁기도 없던 때라 이만한 것도 큰 세간이 되던 시절이었다.
새 학기만 되면 집집마다 세간살이를 조사하던 시절이었다. TV가 있던 집도 있었고, 세탁기가 있던 집도 있었고, 피아노가 있던 집도 있었으나 내가 손을 들 수 있었던 세간살이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있는 집들보다 없는 집들이 많은 동네였기에 손들지 못하는 것들이 크게 부끄럽진 않았던 것같다. 다만, 어느 날 TV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문제로 아이들끼리 실랑이가 붙었던 일들이 있었는데, 난 우리집에 아이들을 데려와서 저 상자가 TV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비가 자물쇠로 잠가 놓아 지금 열 수는 없지만, 우리집에도 TV가 있다고 우기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런 분란이 생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자존심 상하는 실랑이들이 벌어졌었던가 보다.
어미가 세상을 뜨고서도 한동안 버리지 못했던 저 '부라더미싱'을 볼 때면 늘 그 치졸한 거짓말 사건이 떠오르곤 했다. 아비가 어미를 위해 사 온 유일한 세간... 그러나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어미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네 명의 누이들에게 차례로 옷을 물리고, 또 그들의 해진 옷들을 외동아들의 옷들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그건 어미에게 주어진 또다른 노동의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