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여울마을의 이름이 언제부터였는지, 내 기억으로는 알 수가 없다. 어릴 때 우린 그 바다 즈음을 제2송도라 불렀고, 간혹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오물냄새로 인해 똥바다라 부르기도 했다. 그 냄새의 근원이 바위에 들러붙은 채 썩어가는 해조류 때문인지, 비탈집들이 쏟아낸 오물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이 가난의 냄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흰여울마을이 보듬은 골목길들을 따라 이리저리 비틀리다 보면 바닷가에 닿았다. 지금 아이들처럼 방과 후면 각종 학원을 다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그나마 형편이 되는 아이들은 웅변, 주산, 태권도 정도는 다녔지만 우리 동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마저 다니지 못했다)학교를 마치고 나면 별로 할 게 없던 터라 바다로, 산으로, 주로 비탈진 곳들이 놀이터가 되었다.
그땐 꽤나 넓었던 골목길들이 이제 빛한줄금 우겨넣지 못할 정도의 틈새로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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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계단길...도시재상사업으로 다듬어진 길일게다. 노인의 뒷모습이 저 계단만큼 아득하다.
옥상으로 오르던 계단...요만한 높이에도 마냥 즐거웠던 한 때.
도시재생사업이 허룩한 구도심의 풍경을 많이 바뀌 놓은 건 사실이다. 그 변화만큼이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나날살이들도 좀 나아질 수 있기를...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이런 창들이 머리맡에 이어진다. 이런 창틀을 가꿀 줄 아는 이 방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흰여울마을 아래로 내려선 바닷가에는 성게가 많아 아이들이 밤송이 까듯 성게 까는 재미로 쨍,한 햇살 한 때를 그을리기도 했다. 그땐 그게 맛있는 줄도 몰랐고 체질적으로 비린 게 싫었던 나는 그저 가시덩이를 돌멩이로 짓이기는 재미로만 즐겼던 것 같다.
그 마을 쪽에서 오던 아이들 중에 쌍둥이 자매가 있었다. 둘 다 긴 머리칼을 양갈래로 땋아 내려 뒤에서나 앞에서나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걸로 봐선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가 보다.
옛기억엔 제법 큰 바위들이 많았던 것같은데 해변정비를 하며 손질을 했나보다.
흰여울마을에도 어김없이 외부 자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좁은 비탈에 어찌 터를 냈는지 3~4층 규모의 번듯한 카페들이 세련된 몸집으로 들앉았다. 마땅한 주차장 한 폭 갖지 못하는 주민들의 살림살이와 대조적이다. 그러나 골목길 따라 늘어선 각종 샵들은 여느 관광지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가게틀마다 주차장을 만들지 못하는 지형적 특징은 결국 이들 가게들의 성장에 발목을 잡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게 흰여울마을의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묘한 역설의 동네다.
조금만 터가 잡힌다싶으면 어김없이 카페들이 들어선다.
영화 <변호인>의 촬영지였던 곳이 이젠 카페로 변했다. 원래 주인인지, 아님 잇속에 밝은 누군가의 전략적 투자인지 알 수 없으나 제일 크게 바뀐 곳인 듯싶다.
각종 명화들이 걸려 있다. 흰여울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카페 이름은 변호인이다.
국제결혼 광고가 고무대야에ㅎㅎ 이 광고 궁금하다. 광고료 지급이 어떤 방식인지.
봄이면 소풍을 가는 길도 흰여울마을을 지나야 했다. 소풍 장소는함지골로 기억하는데 초입에 사격장이 있어 그 계단 아래 60여 명의 아이들이 오그종종 모여 앉으면 자연스런 구도가 잡히는 곳이었다.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모르지만 풍경이나 배경보다는 아마도 아이들을 한 번에 다 담아내기 위해 선택한 포인트일 것이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엄마는 한 번도 소풍에 따라오지 않았다. 5남매의 외동아들이라고는 하나 일곱 식구의 생계를 위한 하루치의 장사를 대신할 만큼은 아니었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난 그게 서운했고, 엄마는 오래도록 그걸 미안해했다. 다행히 그 양장점집 여자애의 엄마가 그 역할을 대신했고, 사진을 찍을 때도 자기 딸보다는 나를 일부러 앞에 세워 주었다. 그 여자애가 자기 엄마더러 "엄마는 누구 엄마야?"라며 뾰로통해하던 표정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때 나는 은근 기분이 좋았는데, 지나고 나서야 그게 참 안쓰러운 동정이고 연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풍사진을 찍었던 사격장
여기 어딘가...나도 그애도...그리고 눌러붙은 가난의 기억들도 ...
돌이켜보면,
'가난'의 기억은 결코 추억이 될 수 없음을 알겠다. 그건 그냥 기억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어디선가 덜커덩, 뒤늦은 해석이 가능해지는 기억들... 그땐 몰랐고 지금은 알게 되는... 그래서 알싸한 추억조차도 아린 상처로 변해 버리는... 가끔은 이런 글쓰기가 머뭇거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