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아련한 그리움으로 되새겨지는 이름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인들은 저마다의 고향을 그들의 예술품 안에 여러 모습으로 담아내곤 한다. 어린 날의 순수와 성장기의 방황이 뒤섞여 저마다의 '자아'가 형성되는 곳. 그래서 고향은 평생을 두고 그리워하고, 죽기 전에, 혹은 죽어서라도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기억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막막하기만 했던 젊은 날을 꾸역꾸역 치러내고 나니 나도 이제 소위 먹고 살 만한 삶을 꾸리게 되었고, 문득 문득 돌아보는 자리 어디쯤에선 어김없이 유년기 한 때가 딸려 온다. 가난했지만 5남매들이 한데 어울려 살 수 있었던 영도의 어느 비탈길...가난했지만 돌이켜 보면 따뜻한 기억들이 그득한 한 때였다.
최근 다시 가 본 남항초등학교는 수십 년 전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같진 않았다. 내가 다닐 땐 시커먼 합판을 덧댄 푸세식(?) 화장실이 건물 뒤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깔끔하게 정비된 듯하다. 그땐 남학생, 여학생들이 화장실 안에 서로 등 돌린 채 서서 자기의 순서를 기다려야 했던 구조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그 기억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새김질된다.
남항초등학교. 당시 한 학년이 9개 학급이었던, 꽤 큰 규모의 학교였다.
아주 잠깐 다닌 학교였지만 늘 아련한 추억의 한 조각으로 기억되는 공간. 한 학년이 600여 명이나 되던 대규모 학교였고, 그 속에서 난 제법 공부를 하는 축에 끼었었다. 나와 1, 2등을 다투었던 이는, 어머니가 양장점을 운영하고 아버지는 인근 고등학교(부산 남여상) 교사였던, 당시 영도에서는 제법 사는 집 여자애였다. 반듯한 이마에 또렷한 눈망울, 긴 생머리에 뽀얀 피부는 지금 생각해도 영도의 가난한 비탈길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다.
그에 비하면 우리집은 참으로 허룩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월급으로 일곱 식구가 먹고 사는 건 턱없이 부족했고, 비탈길에 꾸린 문방구에서의 수익은 지금 생각해 보면 늘 불안불안한 일상을 겨우 버티게 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육성회비를 낼 형편조차 안 되었음에도 우리 담임은 날 학급위원으로 뽑아 주었고, 부모님은 각 반의 학급위원이 충당해야 했을 성금(?)이 부담스러웠을 텐데도 아무런 내색없이 아들이 학급위원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다. 그런 걸 가늠할 요량이 없던 나이였기에 당시 나는 학급위원 표찰을 가슴에서 단 한 순간도 떼 본 적이 없는 것같다.그건 그 부잣집 여자 아이에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내 자랑이고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그 여자애는 공부도 공부지만 예쁘장한 외모로 많은 남자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그 동네에서는 생일 잔치라는 게 드물다 못해 희귀한 단어였기에 누군가의 생일잔치에 초대되어 가 본 건 그 아이 집이 처음이었다. 따로 선물을 살 형편이 못되었기에 문방구에 있던 용품 중에 가장 고급진 것을 선물로 골랐던 것같다. 코끼리 모양의 판넬에 지우개, 연필, 연필깎이 등 일체 문방용품이 세트로 구성되었던 제품으로 기억된다. 그 값비싼 제품을 선물로 가져 가겠다고 조르는 아들 앞에서 엄마는 흐뭇함보다 당혹감을 느꼈던 건 아니었을지...
처음 가 본 그 아이의 집은 여러모로 낯설었다. 비탈길에 오그종종 매달려 있던 동네집들의 풍경과는사뭇 달랐다. 아마 피아노를 처음 본 게 그때였던가 보다(학교에서조차 풍금을 쓰던 시절이었으니). 그런데 생일상에 초대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여자 애들 몇이 더 있었고, 제법 번듯한 양화점(구둣방) 집 남자애도 초대되어 와 있었다. 누군가에게 경쟁심을 느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지 싶다. 그러나 그 경쟁은 각자의 선물을 개봉하는 순간, 너무나 쉽게 결판이 나버렸다.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문방용품이었던 코끼리 세트는 생일상 밑으로 밀려났고 그 아이의 품에는 구둣방 아이가 준비해 온 하얀 뭉치의 동물인형이 안겨 있었다. 그게 곰이었는지, 강아지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 인형보다 상밑으로 밀려난 내 코끼리에게로 온 신경이 쏟아졌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생일상 아래 길다란 코를 말아 올린 채 이리저리 아이들의 발끝에 떠밀리던 그 코끼리...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 초대된 아이들의 이름도, 얼굴도, 그리고 그들과의 별다른 얘기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 그저 정지된 화면 하나로만 남은 첫 생일초대의 기억. 그 때의 그 아이들이 이제는 누군가의 아내와 남편이 되었을 테고, 또 누군가의 엄마, 아빠가 되어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성대한 생일잔치상을 그들 아이들 앞에 한동안 차려 주었을 것이다. 그 생일상 앞에서 그들은 그 옛날 그저 신기하기만 하고, 조금은 설레기도 했던 우리들의 생일상을 떠올렸을까?
이 길 끝에 영도로터리가 있다. 옛날엔 이 길이 상당한 비탈길이어서 널판지에 양초를 먹여 이 비탈길을 쏟아져 내리곤 했다.
이제, 영도의 그 비틀리고 기울어졌던 동네는 '도시재생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반듯하고 평평하게 터를 넓히고 있다. 당시 일곱 식구의 생계를 겨우 지탱하게 했을 문방구는 도로 확장에 밀려 그 흔적조차 가늠하기 어려워졌고, 그 아이 집으로 향하던 소소한 골목길들은 택지 개발의 삽자루 아래 옛 서사를 다 흩어 놓고 말았다. 언젠가 훗날, 사라져 버린 골목길, 아니 골목길이었을 어느 언저리쯤에서 나처럼 옛기억을 따라 온 누군가를 만나는 날이 있을까...그렇게 오는 이가 있기는 할까...그 유년을 이리 오래 붙들고 살아가는 내가 유난스러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