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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민기 minki Aug 09. 2024

까칠했던 수염의 기억, '영도다리'

-'영도다리' 너머의 풍경들

  교정직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지금으로 치자면 3교대 근무를 하신 듯싶다. 그래서 어떤 날엔 늦은 밤에, 어떤 날엔 환한 날에 퇴근을 하셨다. 모처럼 쉬시는 날이면 문방용품이며 담배 등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을 떼러 국제시장을 오가셨다. 일곱 식구가 먹고 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월급이었기에 아버지는 제대로 쉬시는 날이 없으셨던가 보다.

  국제시장으로 물건을 떼러 갈 때면 아버지는 항상 한 손에 커다란 보자기를 둘둘 말아 쥐고, 다른 손은 내 꼬막 같은 손을 꼭 쥐고 집을 나서셨다. 내 나이 여섯, 혹은 일곱 살 때의 기억이지 싶다. 커다란 보자기는 가게에서 팔 각종 담배를 보루 째 담기 위한 것이었다.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물품들을 다 채우고 나면 보자기는 어느새 몸집보다 훨씬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때도 국제시장에는 먹거리들이 즐비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장을 종일 돌아다니면서도 군것질을 해 본 기억은 없다. 어린 나이에 분명 아버지의 손을 이끌며 고집을 부렸을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린 아들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어야 할 아비의 마음은 어떠했으랴. 모처럼 쉬는 날, 아들의 손을 잡고 다리를 건너던 아비의 마음이 결코 흥겹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버스 안에서 가끔 아버지는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그 노래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린 나이에 그게 난 부끄러워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럴 때면 여린 손바닥 전체로 까칠한 수염이 따갑게 전해졌고, 그 까칠한 수염을 아버지는 내 뺨에 대고 문질렀다. 나는 투정을 부리며 고개를 홱, 틀었다. 그러면 그 자리, 눈 시리게 되비치는 물살 너머에 남항의 어수선한 풍경이 한가득 들어오곤 했다.

영도다리에서 내다본 남항 풍경

  영도다리가 도개교(상판이 들리는 다리)라는 걸 예전엔 몰랐었다. 그저 어린 날에 영도다리는 가난한 비탈 동네를 벗어나 번화한 시가지로 가는 경계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갈 때는 설렜고, 다시 건너올 때는 막막했다. 다리 너머에는 명절 때나 가보곤 하던 용두산 공원이 있었고, 영도 비탈길의 풍경과는 다른 번듯한 길과 번듯한 사람들이 넘쳐 났다. 그 풍경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신기했다. 그런 날엔 동네에서의 모든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그리 다른 풍경과 삶들이 펼쳐질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은 철들면서부터 하기 시작한 것 같다. 국제시장을 다녀오던 어느 날, 문득 궁금해진 게 하나 있다. 그 시절, 국제시장에는 나라안팎의 갖가지 장난감들이 숱하게 널려 있었을 건데 하나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다. 포목점, 담뱃가게, 갖가지 미제 물건들에 대한 기억은 선명한데 가장 뚜렷했어야 할 장난감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혹시 아비는 철없는 아들의 눈에 장난감이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시장통 샛길을 골라 디뎠던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비는 그 시장통 골목길을 얼마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녀야 했을까?


   영도를 떠난 후 20년, 30년... 거의 10년에 한 번씩 가보곤 했지만 그때마다 다리 이쪽의 풍경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부산영화제를 하면서 광복동, 남포동 일대가 부산의 유명 관광지로 떠올랐을 때에도 영도다리 안쪽은 여전히 기름 냄새와 목재소의 톱밥 냄새들이 여기저기서 맡아졌다. 영도로터리에서 옛집으로 오르는 길은 여전히 가팔랐고, 가파른 길들에 맞물린 골목들은 암담한 기억만큼이나 좁고 어두웠다.

과거 영도다리의 도개 장면
철거 위기에 몰렸다가 다시 복원해 과거의 도개 장면을 연출하는 영도다리. 새로운 볼거리가 되었다.
현인이 영도 출신이라는데... 저 동상의 구둣발에 발을 갖다 대면 노래가 나온다.

  부산 국제영화제가 해운대 쪽으로 옮겨가면서 남포동 일대는 다시 허룩해지는 느낌이다.  영화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그 일대가 북적대는 것 같긴 하지만 예전의 그 영화를 되찾기는 어렵지 싶다. 보수동 책방 골목길의 쇠락은 책의 몰락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태종대, 흰여울마을 등이 뒤늦게 영도다리 안쪽의 풍경을 하나씩 바꾸어 가는 듯하지만 결국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최근엔 디지털 미디어 아트 전시관인 '아르떼뮤지엄'의 개관 소식과 대형 카페들 소식도 심심찮게 SNS에 올라온다. 그러나 그것들이 영도의 삶터를 근본적으로 바꾸진 못할 것이다.


  어린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영도다리를 오가며 노랫자락을 흥얼거리던 아비는 이제 아흔을 넘기고 있다. 하루하루 야위어가는 아비의 두 다리를 보면서, 그 다리 위에 앉아 영도다리를 넘나들던 유년의 한 때를 떠올려 본다. 가난했던 아비는 평생 자식들에게 손 한 번 벌리지 않으리만치 악착같이 살았고, 이제는 당신의 장례비까지 마련해 놓았다며 덤덤하게 돈다발을 건네온다. 아비가 건네는 그 장례비를 애써 무심하게 건네받으며 꾹, 꾹, 속울음을 삼킨다. 말없이 돌아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비의 어깨너머에서 평생 고단 을 한 사내의 생이 넘어오고 있다. 그 고된 생을 딛고 살아온 내 생은 어떠한가.


부끄럽진 않았나... 부끄럽진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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